비가 내리는 영도다리를 건널 때 어두워 보이지 않는 멀리 지상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 위에는 가녀린, 그러나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김진숙이 있었다. 김진숙이 꿈꾸는 세상은 함께 땀 흘리고, 함께 일하며, 함께 잘 살자, 같이 일하고, 같이 잘 살되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이었다. 그게 백기완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노나메기’ 세상이었다.
비가 내리는 영도 한진중공업 앞 경찰의 차 벽에 막혀 더 이상 진행을 못 하고 섰을 때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일갈에 ‘명박산성’이 무너지는 사자후였다. “이놈들아, 이 할애비가 진숙이 보러 가겠다는데 왜 길을 막느냐.” 2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오신 백기완 선생님의 외침이었다.
인사동의 어느 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여느 출판기념회와 다름없이 이런저런 축하 의례가 진행되었고 분위기가 칭찬 일색일 때 선생님께 한마디를 청하자 헝클어진 백발을 손으로 한 번 쓱 넘기시고는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라”고 일갈하셨다. 머리가 쭈뼛 섰다.
앞에서 했던 얘기들이 하얗게 다 지워지고 한 울림만 남았다.
무너지지 않아
산이다
세월에도
힘에도
그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아
산이다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도
산은
그대로 산이다
불쌈의 투혼이 살아 있어
그 투혼의 씨알
삼천리에 퍼져
산자의 가슴에 살아 있어
산은
그대로 산이다
외침이 살아 있는 한
산은
언제나 산이다
함께 땀 흘리며 일하고
함께 잘 살아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
외침이 살아 있는 한
산은
언제나 산이다
무너지지 않아
산이다
세월에도
힘에도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아
산이다
(내가 올랐던 어떤 산보다 높은 산으로 자리하는 백기완 선생님을 기리며)
맨 첫발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라고 일갈하셨던 분이 눈에 사라지고 가슴으로 들어왔다.
한 번씩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들이 가슴에 들어와 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가슴에 들어온 그것은 영원히 떠나지 않고 자리하여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고 나의 잘못에 가차 없이 매질하는 회초리가 된다. 언 땅을 어여차 치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처럼 일어나라고 힘을 준다.
김구 선생님은 백기완 선생에게 “통일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던 양심이 하나 되는 것”이라고 얘기하셨다고 한다. 그런 통일, 남과 북의 양심이 하나 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노나메기 세상이 열리는 진정한 통일이 되는 그날.
비오는 그날 어느 선술집에서 뒤풀이하던 때 통일되면 백두산 같이 가시자고 하니 힘이 없어서 가겠냐고 해서 제가 업고라도 가겠습니다고 약속했는데 선생님! 함께 가시지요. 우리 땅 밟아, 남의 땅으로 돌아가는 백두산이 아니라 차를 타고 단숨에 오르는 백두산이 아니라 한 걸음 걷고 눈물 한 바가지 쏟고 한걸음 걷고 피를 한 동이 쏟는 걸음으로 선생님! 함께 가시지요. 휴전선 철조망 끊고 평양을 거쳐 백두산으로!
한국민족예술단체 총연합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