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지르는 듯 크게 벌어진 입과 놀란 눈, 오목·볼록 거울에 비친 듯 휘어진 몸, 카오스처럼 뒤엉켜 흐르는 핏빛 노을과 검푸른 바다. 강렬한 색채와 굴절된 형상이 인상적인 그림. 이쯤 얘기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게다.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가 1893년에 그린 ‘절규’다. 사실 묘사보다는 인간 내면의 감정 표현을 우선시하는 ‘표현주의’의 대표작답게 그림은 제목처럼 절규한다. 그림 왼쪽 상단에는 ‘미친 사람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이란 연필로 쓴 글귀가 있다. 이를 두고 “반달리즘(예술품 훼손)”이라거나 “뭉크의 낙서”라는 등 말이 많았다. 그림을 소장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최근 “뭉크의 일기, 편지 글씨와 대조한 결과 뭉크의 글씨로 확인됐다”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되면 그림의 의미가 더욱 심장해진다. 미친 사람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다는 말은 미치고 싶은 심정이지만 미쳐선 안 된다는 자기 채찍질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뭉크는 어머니와 누나, 남동생을 비롯한 가족의 잇단 죽음과 와병, 가난 등으로 평생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았다. 당대의 사회 현실 또한 암울했다. ‘절규’ 그림이 탄생한 1893년, 당시까지 경험한 것 중 최악의 경제 공황이 미국과 유럽을 휩쓸었다. 이는 21년 후 선진 자본주의 제국 간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적대와 파멸로 치닫는 광기의 세월이었다. ‘절규’는 그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려는 실존적 몸부림의 표상이다. 뭉크에게 그림은 자기 구원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절망과 불안을 신앙으로 극복하려 했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닮았다.
뭉크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지구촌을 무역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미국과 중국 간 패권 다툼은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치열해질 조짐이다. 코로나19는 전세계에 25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도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우울’ 등 후유증도 심각하다. 지난해 우리 정부에 등록된 자살 고위험군은 1만9471명으로, 2019년보다 13.4%나 늘었다. 일본은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자살자가 처음으로 증가하자, 최근 고립·고독을 담당하는 각료를 임명하고 전담 대책기구를 설치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뭉크 같은 절규가 꼬리를 물고 터져나온다. 뭉크와 키르케고르처럼 절망 극복을 개인의 실존적 결단에만 맡긴 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다. 이는 구시대의 낡은 철학일 뿐이다. 국가적 대책이 필요하다. 뭉크를 소환하는 이유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