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 1988년 10월 16일, 지강헌(당시 35) 등 호송 도중 탈출한 미결수 4명이 서울의 한 가정집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였다. 경찰과 대치하다 범인 중 3명이 자살 또는 사살되면서 인질극은 10시간 만에 끝났지만 사회적 파문은 컸다. 지강헌의 주장처럼 법이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 유리하게 시행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휴일 같은 사람/정말 매일 휴일 같은 사람’. 당시 서민들은 지강헌이 죽어가면서 들었던 팝송 ‘홀리데이’에서 휴일 없는 각박한 삶과 사회적 불평등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세 번 변할 만한 시간이니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법의 형평성, 공정성과 관련한 실상은 그리 큰 변화가 없다. 법은 여전히 재력가와 권력자에 치우쳐 있다. 그런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 게 지난 1월 8일 제정된 ‘중대재해법’이다. 산재 사망사고의 35%를 차지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고, 점유율이 41%에 달하는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 적용도 3년 유예됐다. 중대재해의 절반을 점하는 건설업은 원·하청 구조의 정점에 선 공사 발주사가 법망에서 벗어났다. 법 제정 후 우려한 대로 적용 제외·유예 대상에서 여전히 중대재해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합헌 결정은 법의 불형평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명백한 사실을 밝혔는데도 그로 인해 처벌받을 수 있다면, 자신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억누르려는 재력가 권력자 등 기득권층의 입막음용 소송(전략적 봉쇄소송)이 기승을 부릴 게 뻔해서다. 제주 강정마을 군사기지 건설을 반대한 주민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한 해군의 34억 손배소송, 파업농성 조합원에 대한 쌍용자동차의 150억 손배소송 등등. 안 그래도 전략적 봉쇄소송이 남발돼 진실 규명과 표현의 자유 등 헌법적 기본권을 해친다는 비판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2006년 봉준호 감독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자신의 영화에 ‘추억’이란 이름을 붙였던 건 추억일 수 없는 살인사건을 기필코 해결해 추억으로 삼자는 바람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염원한다. 돈과 권력에 관계없이 법이 공평하게 시행되는 날은 언제일까. 그날이 올 때까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에 ‘추억’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