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나 산비탈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뜻의 ‘달동네’는 얼마전 작고한 통일운동가 백기완 씨가 1950년대에 만들었다. 한글학회가 인정해 국어사전에도 실렸다. 급속한 산업화로 고향을 떠났거나 서울 변두리로 밀려난 서민들을 그린 동명의 연속극이 1980년 TBC에서 방영돼 대히트를 치면서 ‘달동네’는 보통명사로 자리잡아갔다.

부산 서구 아미동 역시 피란민이 만든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혔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친 이 마을의 역사는 주민의 삶에 그대로 녹아있다. 나이 많은 1세대 정착민은 말투부터 좀 다르다.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등 고향 사투리가 섞여 있어서다. “이 동네만의 억양이 따로 있다. 우리는 들으면 바로 안다.” 아미동에서 나고 자란 지인에게서 오래 전 들은 얘기다. 일제시대 때 아미동엔 일본인 공동묘지와 함께 화장장이 있었다. 여기서 나온 연기가 아미골 일대를 뒤덮었고, 제물을 먹기 위해 까치떼가 늘 몰려다녔다. 아미동에서 사하구 괴정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을 까치고개라 부르는 이유다. 운전면허를 딴 사람이 차를 몰고 이 고개를 넘어갈 수 있으면 주행은 마스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만큼 지금도 길이 가파르고 꼬불꼬불하다.

비석마을은 아미동 산22번지 일대를 일컫는다.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공동묘지 위에 피란민이 집을 짓고 살아서 붙은 이름이다.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등 일본식 연호가 새겨진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이 주택의 계단이나 굄돌, 축대 등으로 사용됐고 현재까지 적잖이 남아있다. 동의대 연구팀이 70여개의 탁본을 떠 분석해보니 비석의 제작시기는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비석의 수량과 내용이 아직도 완벽하게 파악되지는 않았다.

부산시는 비석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지역 대학 연구진들이 참여하는 온라인 강연회를 17일 연다. 시는 피란수도 관련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비석마을도 후보지 중 하나다. 묘지터에 마을이 형성되고 무덤이 주거공간으로 바뀐 사례는 희귀하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아미동에 공동묘지가 생긴지 110여년, 비석마을이 조성된지는 70여년이 흘렀다. 굴곡진 우리 근대사가 삶과 죽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비석마을을 낳았다. 마을에 깃든 그 시대 사람들의 애환을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인도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