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인구 1억1000만 명의 국가 필리핀.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은 무엇일까? 상당수 동남아 국가 국민들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중계를 보며 축구에 열광하지만, 필리핀만은 예외다. 자타 공인 필리핀 ‘최애 종목’은 바로 농구다. 특히 ‘3 대 3’으로 대결하는 길거리 농구에 대한 필리핀인의 애정은 남다르다. 마닐라 세부 등 주요 도시의 크고 작은 골목길에서부터 깊숙한 밀림 산골마을의 작은 공터에 이르기까지 길거리 농구가 대성황이다. 필리핀의 길거리 농구 실력은 농구의 종주국 미국도 무시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런 필리핀의 농구 사랑은 ‘복싱 영웅’에서 상원 의원으로 변신한 매니 파퀴아오(41)의 정치행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말 집권 여당인 민주필리핀당의 대표로 선출되기 직전 파퀴아오는 이색 선언을 했다. 당시 ‘국제농구연맹(FIBA) 3X3 도하 월드투어 2020’에 출전하는 필리핀 대표팀을 위한 격문을 발표하고 후원 의사까지 밝힌 것이다. 스포츠 영웅의 스포츠를 이용한 정치 마케팅인 셈이다. 그는 이를 통해 지지세를 더 넓혔다. 현역 시절 복싱 메가이벤트의 심장부인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 8체급을 석권하며 ‘영웅’이 된 그는 이제 두테르테 대통령을 이을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까지 성장했다.
필리핀에서의 농구와 복싱의 인기는 미국 식민 지배 영향이라는 분석이 다분하다. 미군과 선교사들이 짬짬이 즐기는 것을 보며 필리핀인들도 친숙해졌다는 이야기다. 미국인이 즐겼지만, 유독 필리핀 국민에게 스며들지 못한 종목이 바로 골프였다. 그런데 마침내 대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6일(미국 시간)로 19세 11개월 17일 나이인 ‘필리핀 골프 소녀’ 유카 사소가 LPGA 최대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에서 비회원 자격으로 우승한 것이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불과 17살의 나이로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에 오른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실력이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우승은 스포츠에 영원한 강자도, 약자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격차의 해소이자 장벽의 파괴다.
유카 사소가 우승한 날이 마침 미국 시간으로 현충일이었다는 점도 우리에게는 남다르다. 필리핀은 6·25 전쟁에 7420명의 병사를 파견한 대한민국의 혈맹이다. 그 중 112명이 전사하고, 299명이 부상당했다. 우리 국민이 이 소녀의 우승을 축하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