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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진 칼럼] 2021년 6월 25일 아침에

  • 강동진 경성대 교수
  •  |   입력 : 2021-06-24 19:16:51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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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정확히 71년이 되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이 70년이 지났다는 것은 직접 경험자들의 소멸과 각기 다른 시선을 가진 3, 4세대가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자칫 사건의 본질이 왜곡되거나 기억의 진정성이 흐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한국전쟁기 피란수도’를 ‘유산’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탁월함과 고유함을 대변하는 문화재 개념의 유산은 아니며, 전쟁과 피란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갈등 상황에도 놓일 수 있는 슬픈 운명을 지닌 매우 특별한 유산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023일 동안의 피란수도가 혹독했던 전쟁 중에서도 국제협력을 통해 외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100만 피란민들을 배려하며 그들의 삶과 기억을 품었던 유산이란 점이다. 이향의 고통과 혹독했던 가난을 포용했던 인류애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16세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핀란드만의 늪지대에 건설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세계 제2차 대전 당시인 1941년 9월부터 1944년 1월까지 872일 동안 독일군에 포위당한 채 100만 이상의 시민이 굶어죽으면서도 버티며 저항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결국 전쟁 역전의 계기를 제공했다. 20세기의 전례 없던 시련 가운데 살아남은 이 도시를 후대는 ‘영웅 도시(Hero City)’라고 부르며 872일간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1023일 동안 지속된 피란수도 부산을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가. 1023일 아니 이후 20여 년간 치열했던 국가 재건의 시기 가운데 희생했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또한 평화 수호를 위해 나섰던 수많은 젊은이들과 방황하던 피란민들을 도왔던 무명의 손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냥 뭉뚱그려 고마웠던 참전용사나 우연히 있었던 일로만 여기고 있진 않는가. 오늘이 돌아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치러지는 추모식과 세워 놓은 기념탑들만으로 그 기억들을 때우고 있진 않는가. 아픈 기억은 잊는 것이 상책이라지만, 한국전쟁에서의 부산이, 참전용사들이, 그리고 공생했던 부산의 사람들이 우리 기억에서 점차 지워지는 현실 앞에서 맘이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만 추려본다. 1950년 8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낙동강에 최후의 배수진을 쳤을 때, 부산과 부산항이 없었다고 상상해 보자. 혹독했던 40여 일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고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부산은 그런 도시였다. 전쟁의 공(功)은 뒤로 한 채 전쟁 역전의 상황을 묵묵히 지원하며 셀 수 없던 피란민을 받아낸 도시였다. 영웅 도시라고 부르지는 못할지언정, 그 수고를 제대로 알게 하고 전하려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우린 스스로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과 피란수도의 기록물을 볼 때면 부산의 정황은 어떠했고 피란의 실상은 어떠했는지, 또 대한민국은 어떻게 회복되고 회생될 수 있었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순간들 마다 필자의 가슴 속엔 ‘뭔가 제대로 된 기억을 후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열망 아닌 열망이 채워지곤 한다. 그 열망의 핵심은 ‘기억의 본체들에 대한 유산화’이다. 기억이 유산이 된다는 것은 기억을 신주단지처럼 모시자는 것이 아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는 다짐과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피란수도에 담겨있는 여러 기억들이 더 이상 사라지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이다. 유산의 기억 보호는 유산과 관련된 상흔들, 당사자들의 증언과 흔적들을 찾아 모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전쟁의 직접 경험자들과 기억의 실 보유자들의 수가 급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덩달아 피란수도의 생생했던 현장들도 급속히 훼손되거나 해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물론 오래전부터 이 기억들을 모으기 위한 노력은 해왔다지만 피부에 크게 와 닿진 않는다.

부산이 우리나라 최고의 근대역사도시라는 것은 이미 정립된 사실이다. 현재 부산에 있어, 한국전쟁과 피란수도의 기억보다 실체적인 근대의 기억은 없다. 한국전쟁과 피란수도의 기억을 지운 채 부산의 근대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부산이 직할시를 거쳐 광역시가 된 이유와 산복도로와 제1부두 그리고 유엔기념공원의 존재를 설명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분명 ‘부산의 강력한 상징 브랜드’로 삼을 수 있다. 국내·외적으로 특정의 기억을 도시 브랜드로 인정받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냉전을 열었던 전쟁을 1023일 동안 버텨낸 도시, 100만이 넘는 피란민을 포용했던 도시, 전 세계 유일의 유엔군이 잠들어 있는 도시라는 부산의 팩트들은 21세기가 지향하는 포용의 브랜드로 삼기에 충분해 보인다.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둔 채 다른 것을 좇고 있다면 그것은 허상이며, 더군다나 이미 가진 것을 모른 채 훼손하려 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라는 말이 있다. 피란수도 부산의 기억들은 분명 탁월한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이며, 여느 것이 넘보지 못하는 부산 최고의 브랜드가 되어 줄 것이다.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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