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은 강렬하다. 작가의 저작 의도가 농축되어 있다. 짧은 서문이 긴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몇 서문은 젊은 시절 나를 뒤흔들었다. 김은국은 소설 ‘순교자’ 영문판 서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 “카뮈의 ‘이상한 형태의 사랑’에 대한 통찰이 필자로 하여금 한국 전선의 참호와 벙커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해주었기에 이 책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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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기자 |
이 서문은 20대 초반 나를 카뮈 속으로 몰아 넣었다. 70년대 말 대한민국에서 20대 초반을 살아가던 청년의 마음도 김은국처럼 스산하였다.
나는 카뮈의 소설들 그리고 이론적 저작들인 ‘시지프의 신화’‘반항하는 인간’을 읽고 무신론적 실존철학에 빠졌다. 의과대학 문집에 ‘부조리와 반항’이라는 제목의 내 최초 논문을 기고하며 ‘알베르 카뮈론’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카뮈가 내 가슴에서는 영원히 살아 꿈틀거릴 듯 보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 나는 교회로 돌아갔고 카뮈의 철학 역시 내 속에서는 불태워졌다. 그래도 그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는 의학소설 ‘페스트’를 남겼다. 필자의 의학사 수업 때 마다 그는 ‘페스트’와 함께 다시 불려 나왔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서문은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 그의 스승 장그르니에 소설 ‘섬’의 서문은 노벨상수상으로 이미 청출어람이 되었던 카뮈가 썼다. 저서에 비해 과한 듯한 이 서문은 역사에 남는 기념비적 서문으로 평가받는다.
“과연 이 책은 우리가 우리의 왕국으로 여기고 있던 감각적인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그와 병행하여 우리들의 젊은 불안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막연하게 체험한 감격과 긍정의 순간들은 그르니에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들의 원칙이거니와 그는 그것의 영원한 흥취와 동시에, 그 덧없음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반면 자연과학 책의 서문은 건조하다. 문체에도 내용에도 감동이 없다. 책 내용을 짧게 요약할 뿐이다. 하지만 예외적인 서문이 없지 않다. 나는 ‘The Clock of Ages:노화시계’(저자 존 메디나)라는 책의 특별한 서문을 잊지 못한다. 이 책의 서문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말을 건넬 시간이었다”로 시작한다. 죽음을 시사하며 독자를 긴장시킨다. 그리고 어머니가 거울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얼굴을 한탄하던 장면으로 이어진다. 철없던 저자는 그 때 마다 어머니의 애창 곡인 ‘The Rock of Ages(만세반석 열리니)’ 제목을 빗대어 ‘The Clock of Age(노화시계)’는 누구도 멈출 수 없다고 놀렸다. 그의 저서 이름은 그의 철없던 행동에서 잉태되었음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다음은 저자가 대학 진학으로 집을 떠나기 직전 방으로 불쑥 들어온 어머니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데뷔를 앞두고 관계자의 추파를 뿌리친 대가로 영화배우 경력을 포기했다는 오래 숨겨둔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눈부시게 아름답던 사진들을 아들에게 건네고 방을 나갔다. 그때 어머니 쓸쓸한 뒷모습이 병상의 어머니와 겹쳐진다. “TV를 꺼 주렴!” 이 부탁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머니가 잠들자 저자는 밤새 운전하여 노화 연구에 매진하던 실험실로 돌아갔다. 일주일 뒤 어머니는 노화시계와 벌였던 전쟁의 종국을 맞는다.
자연과학 책 서문에도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이유는 노화의 끝이 인생 허무의 근본인 죽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서문을 읽은 경험 때문에, 매번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나는 새 전공 서적을 구입하면 서문을 허투루 뛰어넘지 않는다.
동아대 의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