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이 폐막을 향해 가고 있다. “장례식 같았다”는 혹평은 지나쳤지만 관중석의 적막 속에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개막식이었고, 방사능의 위험과 팬데믹의 긴장에 휩싸인 채 치러진 대회였다. 도쿄 2020 올림픽은 작년에 1년 연기했을 때, 이미 실패한 대회였다. 4년 단위 개최라는 ‘올림피아드(Olympiad) 원칙’을 무시하고 2021년에 열림으로써 ‘억지 올림픽’이라는 오명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렇다고 올림픽 그 자체에 레퀴엠을 울리자는 뜻은 아니다. 도쿄 올림픽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자면, 앞으로의 대회를 위해 반성할 거리들을 많이 제공한 ‘반면교사’ 같은 올림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이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이번 올림픽의 수많은 문제들이 경기 중계방송의 격정과 환호에 묻혀버리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나 자신도 밤늦게까지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느라 올림픽에 연관된 이런저런 걱정거리들을 잊고 만다. 5년을 기다려온 선수들을 생각하면 비판의 칼날은 무뎌진다.
그러면서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일본 정부가 ‘어떻게든 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을 때 ‘다 계획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 씁쓸해진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온갖 우려에도 일단 출발시켜 놓으면, 자국 선수들을 향한 응원과 함께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올림픽 경기는 그 관성에 의해 앞으로 갈 것임을.
토마스 바흐 위원장은 각종 중계권 덕에 재정적으로 한시름 놓았을 것이고, 스가 총리는 정치적 손익계산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년부터 그들이 취했던 여러 정책적 혼선과 약삭빠른 셈법에 의한 의사 결정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올림픽 개최 여부에 정치적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올림픽의 원칙에 어긋난다. 더구나 바흐 위원장은 국가 상징물 사용 등 정치적으로 문제 될 수 있는 사안에 편파적이고 편의주의적인 해석을 남발했다.
스포츠와 올림픽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매이는 것은 오늘날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적 판단의 정당성과 공평성을 보장하는 것은 국제기구와 개최국의 여전한 의무이다. 경제는 구조이지만, 정치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중계방송과 온라인 시청으로 활성화되는 ‘언택트 올림픽’의 의미를 역설하지만, 진실은 이번 올림픽이 ‘화면에 가려진 올림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올림픽을 위해서도 ‘잘못된 올림픽’에 대한 반성뿐만 아니라 올림픽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한다.
올림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놀이이다. 공식 명칭(Olympic games)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게임이기 때문이다. 게임은 ‘규칙을 정해 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고대로부터 놀이는 삶의 본질적인 요소였다. 올림픽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놀이하는 아이를 삶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그 “아이가 왕국을 다스릴” 것이라는 경구를 남겼다. 레슬링 경기에서 우승한 적도 있는 플라톤은 “남녀 모두 놀이하는 삶을 살면서, 현재의 그들과 다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놀이에서 나올 수 있음을 시사했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호모 루덴스’의 작가 호이징가는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방대한 학술적 탐구를 했다. 그는 놀이의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어떻게 놀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그는 놀이의 특성 가운데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에 주목했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에서만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놀이는 “놀이 고유의 과정과 의미를 갖게” 된다.
시공간의 한계에서 놀이는 스스로 질서를 창조하며, 그렇게 창조한 “질서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해놓는 것이 놀이의 규칙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놀이는 그 자체로 ‘공정한 놀이(fair play)’여야 한다. 곧 ‘페어플레이’는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룬 놀이가 아니라, 놀이가 놀이이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호이징가가 페어플레이를 각종 경연이나 스포츠에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페어플레이 정신은 인간이 뭔가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에 일반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든 “진정한 문화는 반드시 페어플레이를 요구한다.”고 했다.
이런 놀이의 특성은 ‘전인류적 스포츠 문화 제전(祭典)’인 올림픽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 참가 선수들의 페어플레이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제전은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조직되고 운영된다. 따라서 그 일을 맡은 사람들도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 곧 올림픽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일을 놀이 정신으로 해야 하며, 놀이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 누구보다도 IOC는 페어플레이의 선봉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가? 아니 그것이 뭔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진지하고 혹독한 자성이 있을 때에만 올림픽의 미래는 보장될 것이다.
철학자·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