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부부 짐과 델라. 어느 크리스마스에 델라는 자신의 긴 갈색 머리카락을 팔아서 20달러를 마련한 뒤, 남편의 시계에 어울리는 시곗줄을 선물로 샀다. 반대로 짐은 델라에게 최고급 머리빗을 주려고 아끼던 시계를 팔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부는 당황했다. 델라는 울음을 터뜨렸고, 짐은 델라에게 지금 숏컷을 했는데 혹시 페미였느냐고 묻기 시작하는데…’

폭소를 터뜨릴지 씁쓸해해야 할지. 오 헨리의 소설을 패러디해 인터넷에 떠도는 이 글은 도쿄올림픽 영웅 안산에 대한 ‘페미’ 공격을 풍자했다. 공격자들은 젊은 페미니스트 중에 안산 선수처럼 숏컷을 한 이가 많다는 점, 그가 SNS에 남성혐오의 의미를 담은 은어를 썼다는 점을 들어 그가 ‘페미’라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한 수만 건의 기사가 인터넷상에 쏟아졌는데, 상당수가 ‘안산 페미 논란…’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떤 여성 정치 유튜버는 “안산이 페미인지 아닌지만 밝히면 해결될 일”이라고 말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 자체를 ‘논란거리’로 규정한 것이다.

뻔한 얘기를 좀 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뜻하는 ‘feminine’에 ism을 붙인 단어지만 실은 여성주의가 아닌 성평등주의다. 이 성에는 남성 여성 양성의 특징을 모두 가진 성까지 포함된다. 인류사 대부분에서 여성의 지위가 현저히 낮았기에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명백히 성평등에 가까워지는 길이었고, 피억압자인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야 했기에 명칭이 ‘페미니즘’이 된 것일 뿐이다. 같은 인간임에도 성별이 다르니까 차별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통념에 맞서 싸울 이론적 바탕이 된 페미니즘은 종교, 출생지, 장애 여부, 물고 태어난 수저 등을 이유로 인간을 차별할 수 없다는 세상의 모든 ‘이즘’과 통하는 철학이다.

페미니즘 만큼 단기간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온 사상도 없을 것이다.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에게도 그렇다. “남자가 여자처럼 질질 짜느냐”는 식의 감정 억압이 폭력이라는 게 상식이 된 것도, ‘결혼할 때 집은 남자가 마련해야지’라는 한 시대의 명제가 설득력을 잃어가는 것도 페미니즘 영향이다. 불과 10년 전 영화·드라마만 봐도 성역할과 성평등에 대한 개념이 크게 진보했음을 체감한다. 여자는 왜 안되느냐는 물음을 남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평등사상이 페미니즘이다. ‘올림픽 양궁 3관왕쯤은 돼야’ 눈 감아줄 수 있는 불온한 철학이나 결함이 아님은 당연하다. 페미니즘으로 인해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진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아도, 이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 그렇게 생각한다면 불행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고 있는 것이다. 한쪽 날개가 축 처져서 불안하게 날던 새가 균형을 잡고 난다면 그것은 새에게 좋은 일이지 다른 날개를 다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여성의 권리도 비약적으로 향상됐으니 “이제 그만 징징거려라”는 게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요지인 듯 하다. 언제까지 있지도 않는 차별을 거론할 거냐는 얘기다. 그러나 사람 간의 차별 금지를 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차별이 존재할 때까지 유효한가. 여성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외간 남자와는 말도 섞어서는 안 되는 나라나, 청혼을 거절당했다고 대낮에 여성을 살해한 남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마는 그런 나라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일까. 동일 수준 노동을 하는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적고, 여성이 가사와 육아, 노부모 부양 노동을 압도적으로 더 많이 하는 나라,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채용과 사회생활의 기회가 동등하지만 실제로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는 페미니즘이 ‘배 부른’ 사상이 되는 걸까.

크건 작건 불균형이 존재한다면, 이를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개선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지 않고 따지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이 사회도 없었다. 왜 남성혐오 표현을 쓰느냐, 왜 억압자와 똑같은 방식으로밖에 대응 못 하느냐는 비판은 온당하지만 “페미니스트인지 밝혀라”며 사상검증을 시도하는 건 심각한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