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외부 작용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과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가 2001년 발표한 ‘벅스 버니’ 실험 결과가 기억 세뇌의 대표적인 사례다. 로프터스 교수는 학생들에게 디즈니랜드와 무관한 워너 브라더스의 만화영화 주인공 벅스 버니(토끼)를 선전하는 가짜 디즈니랜드 광고를 보여준 뒤 어릴 적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을 물었다. 그랬더니 설문 대상자의 36%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났다고 답했다. 그 중 상당수는 벅스 버니를 포옹하거나 쓰다듬었다는 불가능한 경험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로프터스 교수보다 60여 년 앞서 인간의 그런 심리를 꿰뚫어 봤다.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괴벨스의 말에는 대중의 기억·의식 세뇌와 관련한 뛰어난 능력이 집약돼 있다. ‘나를 태워라!/내 책은 언제나 진실을 전하지 않았던가!/(중략)/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한데 이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나는 너희들에게 명령한다./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시 ‘분서’를 통해 나치의 그런 기만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브레히트는 소아마비를 앓아 발이 짧은 괴벨스에 빗대어 “거짓말은 발이 짧다”고 풍자하기도 했다.
기억은 외부 작용만이 아니라 기억 주체에 의해서도 조작될 수 있다. 부끄러운 기억일 때는 그럴 개연성이 더 크다. 역대 일본 정부의 집요한 과거사 왜곡에서 지겹게 겪은 바다. 이보다 정도가 낮은 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소극적 부정이다. ‘고발 사주’ 의혹의 중심에 선 국민의힘 김웅 의원이 지난 8일 기자회견에서 그 단면을 드러냈다. 그는 “기억 나지 않고 확인할 방법도 없다”며 모든 의혹에 빗장을 걸었다. 이에 대해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선택적 기억상실증은 뇌의 이상 없이 심리적 원인으로 발생하는 해리성(解離性) 기억상실증의 하나인데, 전쟁 등 특정 사건에 얽힌 일부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증상이다. 한데 이는 어디까지나 타의적 요인에서 비롯된 증상이다. 실제 기억하면서도 죄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발뺌하는 건 선택적 기억상실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기억만 모아 편집하려는 ‘선택적 기억’일 따름이다. 독재는 진실을 왜곡하려는 선택적 기억에서 싹튼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