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의 ‘원산지’는 이탈리아다. 쥬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La donna e mobile)’라는 아리아가 시초다. 이 노래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독창곡 중 하나로 히트하면서 널리 회자됐다. 하지만 문학적 표현임을 제외한다면, 사실 이 말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양성 평등을 저해하는 대표적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자의 마음은 억새’라고 표현하면, 꽤 어색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갈대나 억새나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기호의 속임수’ 때문이지 싶다. 말과 표현이 하나의 소리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 익숙한 상징 기호가 아닐수록 거슬리게 마련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표현 또한 비슷하다. 근거도 없는 이 말이 사실인 것처럼 통하기 일쑤다.
하지만 ‘가을은 억새의 계절’이라고 한다면 이견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산등성이마다 무리지어 하얗게 꽃을 피운 억새를 보며 가을 정취에 젖어 보는 것이 이 계절에 즐기는 작은 사치이자 낭만이라는 데 대부분 수긍하기 때문일 게다. 알고보면 억새는 꽤나 속이 꽉차고 당찬 외유내강형의 풀이다. 가느다란 줄기에 보들보들한 꽃을 피우고 산들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므로 겉으로는 연약해 보인다. 허나 억새는 흔들릴 지언정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끈질긴 생명력의 풀이다. 생육환경부터 척박하다. 갈대가 물 많은 곳에서 자라는 반면 억새는 물이 거의 없는 곳에서도 잘 자란다. 서로 엉키듯 무리를 이룬 굵은 뿌리가 튼튼하니 강풍도 아랑곳없이 산정에서도 잘 산다. 한 해만 살지 않고, 땅 속 뿌리가 겨울을 견딘 후 이듬해, 그 이듬해까지 줄기와 꽃을 피워낸다. 꽃을 가장한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다시 싹을 틔우며 세력을 확장한다.
그래서 억새의 특징은 정치와도 통한다. 억새가 씨앗을 산과 들로 날려 세력을 넓히듯이, 겉으로 친절하면서 속으로도 실력과 도덕성을 갖춘 정치인이 ‘바람’을 잘 타면 그 세력을 넓힐 수 있다. 억새의 꽃말이 ‘친절·세력·활력’인 것도 그런 연유인가 싶다.
바야흐로 ‘억새꽃 필 무렵’이다. 이번 주말 억새산행은 어떨까. 합천 황매산, 창녕 화왕산, 울주 신불산과 간월재, 밀양 재약산 사자평, 양산 천성산, 경주 무장산 같은 곳은 들머리까지 부산에서 1시간 남짓이다. 부산에도 장산 백양산 승학산 철마산 같은 억새 명소가 많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