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는 ‘알파벳 R이 없는 달은 굴을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공교롭게도 R이 없는 달은 5월(May) 6월(June) 7월(July) 8월(August)이다. 산란철과 겹치고 수온이 높아 독소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속설은 지극히 과거, 북반구, 서구 중심의 관점이다. 지구의 모든 수산물이 신선한 상태로 유통되는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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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더미처럼 쌓인 굴을 순식간에 처리하는 ‘굴박신장’. |
한국에서 굴의 계절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한국인이 가장 흔히 먹는 굴은 참굴이다. 통영 거제 고성 여수 등 남해안에서 생산되는 참굴은 전국 굴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그 중심에는 굴의 고장 경남 통영시가 있다. 통영 수산업에서 굴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굴수하식수협’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산업협동조합(수협)은 지역조직과 업종조직으로 나뉜다. 대부분이 지역조직이지만 산업의 규모가 큰 수산물의 경우 업종조직이 따로 결성되기도 한다. ‘굴수하식수협’은 통영의 수산업에서 굴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굴 시즌의 시작은 굴수하식수협에서 생굴 경매가 시작되는 날(초매식)로 본다. 올해 초매식은 지난 10월 21일 열렸다. 작년에는 태풍의 영향으로 굴 생산량이 다소 저조했으나 올해는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생산량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굴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소식이다.
굴의 가격과 맛의 상관관계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수산물은 철저하게 수요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우리나라 굴 가격의 변곡점은 김장이다. 김장철에 의외로 굴 소비량이 많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김장이 마무리되는 12월 중순까지는 산지 경매가가 지속적으로 오른다. 이듬해 1월부터는 가격이 하락한다. 그런데 바닷물 속에서 자라는 굴은 늦게 수확할수록 더 크고 맛도 깊어진다. 가장 비쌀 때가 가장 맛있는 때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굴을 ‘개수’ 단위가 아닌 ‘Kg’ 단위로 먹을 수 있는,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나라다. 한국에서 먹던 스케일로 외국에서 굴을 먹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렇게 굴이 풍부한 것은 굴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과 축적된 기술 덕분이다. 그런데 숨은 공로자가 따로 있다. 수확한 굴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박신장’이다. 말 그대로 껍질을 벗기는 작업장이다. 수십 년 경력의 아주머니들이 칼 한 자루만으로 신기에 가까운 속도로 굴을 깐다. 수다스럽기로 소문난 경상도 ‘아지매’들이 말 한마디 없다. 까는 만큼 벌기 때문에 한가롭게 노닥거릴 틈이 없다. 경험이 밑천이고, 시간이 돈이며, 능력만큼 벌어가는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다. 깔끔하게 손질된 굴을 드실 때는 이 아주머니들의 역할을 꼭 기억하시길 바란다.
제철 신선한 굴은 초고추장에 찍어 날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어패류를 익히지 않고 먹는 것을 꺼리는 서양인들조차 굴은 날 것을 선호한다. 서양인들은 초고추장 대신 핫소스와 레몬즙을 뿌려서 먹는다. 올해는 굴을 드실 때 초고추장과 더불어 핫소스와 레몬을 함께 곁들여 보시길 권한다. 제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인간의 방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