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초량에 있는 옛 백제병원에 가보았다.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로 10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도 처음 가보았다.
강서 명지 출신으로 일본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 최용해는 1921년(혹은 1922년)에 백제의원을 개원했다. 5년 후 목조건물을 허물고 6층짜리 석조건물을 지어 1927년에 확장 개원한 것이 백제병원이다. 백제병원은 부산 최초의 근대식 사립(私立) 종합병원이다. 관립(官立)병원으로 광복동에 있던 부립(시립)병원(1877년 개원), 지금의 지하철 1호선 초량역 인근에 있던 철도병원(1923년 개원)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40병상 규모로 최 원장 외에 일본인과 독일인 의사도 일하는 다국적 진료진에 30명의 간호사가 근무했다. 아마 최용해 원장은 부산에서 가장 성공한 조선인 개원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5년도 되지 않아 병원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1932년에 최 원장은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잠적해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일설에는 원장의 일본인 아내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도 하지만 부산의 다른 병원들이 일본의 관립병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맞지 않는 말이다. 다른 설명 중에는 병실에서 발견된 인골(人骨) 파문이 있다. 병원에서 치료받던 행려병자(무연고자)가 죽자 그 시신을 최 원장이 골격표본으로 만들어 몰래 보관했는데 그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시민은 분노했고 불매운동에 나서는 바람에 병원이 망했다고 한다.
의사들이 시신을 해부하거나 골격 표본으로 만든 일은 우리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서양 근대 의학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백제병원의 인골 파문보다 50년 앞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는 16명이 희생된 ‘웨스트포트 살인’ 사건이 알려져 큰 충격을 주었다. 2인조 연쇄살인범들은 자신이 운영하던 여관에 투숙한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은 해부용으로 외과의사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겼다.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장물아비로 의사가 나설 정도로 당시에는 해부용 시신이 귀했다.
해부학이 의학의 필수과목인 된 것은 18세기다. 의사들은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든 몸을 알아야 했다. 의사들은 가능하다면 많은 해부 경험을 쌓아 해부학을 익히고 병리학을 배웠다. 의학의 기본이 된 해부학과 병리학은 이러한 노력으로 토대를 쌓아갔다. 의학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시신은 귀했다. 처음에는 사형수들의 몸을 썼지만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인권의식이 신장되자 극형에 처해지는 범죄자들의 수가 급감했다. 그러자 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해 의사에게 비싼 값에 파는 도굴꾼들이 생겼다. 가난한 의사나 학생들은 직접 삽과 곡괭이를 메고 한밤중에 묘지로 나갔다.
웨스트포트의 연쇄살인마는 처음에는 의사에게 못 받은 방값이라도 받겠다고 투숙객의 시신을 넘겼다. 하지만 이 거래가 꽤 짭짤한 수입이 된다는 사실을 알자 본격적으로 멀쩡한 투숙객을 살해했다. 결국 살인범은 사형되어 해부를 당하고 골격표본이 되어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불법을 눈감아 준 의사도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이 일자 영국 정부는 1828년에 해부법을 제정해 불법적인 인체 해부를 금지했다.
우리나라는 1910년에 경성부사(서울시장)가 행려병자의 시신을 해부할 수 있도록 한 기록이 있지만 1962년이 되어야 시체해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니 1920년대의 최 원장이 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심은 법 감정과는 많이 달랐다.
그런데 혹시 모르는 숨은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 왜 골격표본을 만들었을까? 누구의 몸이었을까? 독일인 의사는 왜 부산에서 일했을까? 유일한 조선인 사립병원은 왜 그렇게 재빨리 몰락해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을까?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에 최 원장은 어떻게 살았을까? 무척 궁금하다. 100년 전 이 도시에 있었던 이 사건을 누가 좀 캐내면 좋겠다. 역량 있는 부산 작가가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 이야기가 완성되면 붉은 벽돌 건물로만 덩그러니 남은 백제병원은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을까? 한번 기대해본다.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