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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이 땅에서 영원히 젊은이로 남은 그들

  • 강동진 경성대 교수
  •  |   입력 : 2021-11-18 19:46:43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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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UN묘지 조성 7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부산에서 열렸다. 1951년 4월에 UN묘지(현 UN기념공원)가 조성되었으니 올해가 꼭 70년이 되는 해이다.

기조강연과 5편의 논문 발표를 기다리던 중 전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순간을 만났다. 영국군 보병으로 참전했던 브레인 호프(Brain Hough)의 기념사 시간이었다.

“맨체스터의 가난한 노동자 출신인 저였지만 부산에 도착했을 때 충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겪던 가난으로 인한 고통은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중략) 친구들의 시신을 고향으로 데려왔더라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모두 잊혔을 겁니다. 그러나 부산에 있는 묘지에서의 그들은 결코 잊히지 않았습니다. (중략)살아있을 때처럼 늘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있고 한국 사람의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보살핌 속에서 영원히 젊은이로 남아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은 제 과거를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들의 나라에 헌정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마디입니다. 감사합니다. 내 친구들을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70년 긴 세월로 인해 비록 발음은 어눌해졌지만, 들려오는 의지로운 그의 목소리는 결코 노병은 죽지 않았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부산의 이곳에서 여러분의 보살핌 속에 친구들이 영원히 젊은이로 남아 있다는 노병의 독백 아닌 독백은 대한민국을 향한, 아니 부산을 향한 ‘특별한 선언’과도 같았다. 참전용사의 고뇌를 들으며 과거의 아팠던 상처의 시간이 현재의 보람이 되었고, 또 미래의 유산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 며칠 후 11월 11일 11시, 참전용사에 대한 추모 행렬에 묻혀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의 묵념을 하던 중,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70여 년 전 왜 이들은 이 땅에 왔을까?” “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을까?”

허공에 울려 퍼지는 조포 소리와 함께 퍼져 오르는 희뿌연 화약 연기가 마치 이곳에 잠든 2314명의 유해, 아니 4만1000명에 이르는 망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름 모를 흰 머리칼의 노병들이 부축을 받으며, 또 휠체어를 탄 채 공원 곳곳을 서성인다. 친구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에 심으려는 듯 묘석을 응시하는 노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이 왜 그리 무거워 보이던지.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묘석 위에 내려놓고 떠나는 뒷모습이 그날따라 왜 그리 쓸쓸하게 보이던지.

누군가 내게 2314명의 유해가 가진 의미에 관해 물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의 희생물이자 우리 땅에 또 우리의 마음에 남겨진 영원한 유산이란 상투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유산화(heritification)’라는 말이 떠올랐다. 과거의 사실이나 어떤 사건이 집단의 기억으로 바르게 정립되어 가고 그 현장은 영원한 장소로 전환되어 남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근대, 즉 19세기 중후반 이후 탄생된 사건이나 사실과 관련된 유산화는 그리 녹록지가 않다. 상당수가 산업화의 각종 후유증, 식민지 수탈과 노예 문제, 전쟁과 학살 등과 관련되기에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갈등’이다. 하나의 사실을 놓고 관점이나 처지가 달라 생기는 것이다. 세계 유일의 2314명의 유엔군이 영면하고 있는 묘지임에도, 미소 양 진영이 칼날을 세우며 냉전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전쟁의 결과물이었으니 내포된 갈등의 존재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유럽에서 ‘비판문화유산학’이란 학문이 등장했다.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형성된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한 지역이다 보니 전쟁으로 남겨진 흔적과 기억을 유산으로 이해하려는 생각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의 유산들은 외형적 가치보다는 내면의 아픔, 즉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치유되지 못한 고통에 연루된 경우가 많다.

비판문화유산학에서는 이러한 유산이 가지는 양면성, 즉 아군의 평화에 대한 정당성이 상대의 적개심과 연결될 수 있음을 논하며 이를 경계하기도 한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UN묘지의 미래 역할에 대한 확장의 필요성이 강하게 인지된다. 사실 지난 5일 학술세미나의 참여자 모두도 이에 공감했다.

전쟁 때문에 탄생한 UN묘지가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장소로 전환되었다. 지난 70년 동안 UN묘지는 무탈한 가운데, 숭고한 희생정신을 품은 장소로 지켜졌다. 참전용사가 모두 사라질 시대, 전쟁의 경험을 갖지 못한 후대가 살아갈 다음의 70년 동안 UN묘지는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할까? 또 후손들은 이곳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전개되어 갈 UN묘지의 유산화는 국제 평화를 더욱더 올바르게 세워가는 시간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또한 부산의 ‘진수(眞髓)’를 온전하게 증거하고 모든 아픔을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진정 살아있는 유산이 되면 좋겠다. UN묘지 조성 140주년이 되는 그날, 모든 후손이 이곳에서 영원히 젊은이로 남아있을 이들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추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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