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학생 운동권에겐 두 가지 큰 ‘투쟁과제’가 있었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외세에 의한 남북분단과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착취를 당시 한국사회 가장 큰 문제로 봤던 것. 이 중 ‘우선적 타파’ 과제는 운동권이 둘로 쪼개질 정도로 논쟁적 사안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양측의 제도 정치권 편입과 함께 논쟁 역시 제도권으로 수렴됐다.
뜬금없이 과거를 소환한 것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또 다른 모순 때문. ‘서울공화국’으로 상징되는 수도권 집중의 폐해에서 비롯된 ‘지방모순’ 말이다. 국토 12%에 불과한 수도권 인구는 이미 2년 전 국민 절반을 넘어섰다. 세계 최고 밀집도. 반면 지방은 ‘졸아들고’ 있다. 시·군·구 47.2%(108곳), 읍·면·동 50.4%(1791곳)가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됐다. 경제의 중앙 집중도 심각하다. 지역내총생산(GRDP)에서 수도권 비중이 지난해 52.1%로 지방을 따돌렸다. 여기다 전국 1000대 기업 중 743개사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매출액 기준으론 지방과의 격차가 더 벌어진다. 86.9% 대 13.1%. 사람과 기업의 수도권 쏠림으로 지방소멸은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파멸적 집적’이다. “특정 지역의 인구가 다른 지역보다 조금이라도 많으면 이 지역으로의 기업과 인구 이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타 지역에 파멸적 결과를 가져오는 극단적 집적 현상”을 일컫는 ‘경제지리학’의 한 이론. 성경륭 전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이 언론기고를 통해 소개한 뒤 인구에 회자돼 왔다.
예리한 시각과 날 선 단어로 한국사회를 직격해온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이른바 ‘내부식민지론’으로 경고음을 한층 더 높였다. “오늘날 서울-지방 간 발생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은 과거 일제강점기의 동경-경성 간 관계와 너무도 비슷해 깜짝 놀랄 정도로 지방은 정치·경제·문화·교육·언론 등 전 분야에서 서울에 종속된 식민지이다.” 당연히 그의 해법은 “서울민국 타파”. 2015년 ‘지방식민지 독립선언’이라는 저서에서 피 토하듯 외쳤다. 정말 독립전쟁이라도 해야 할까.
그런데 ‘식민 종주국’ 서울도 마음이 편치 않다. 지난해 서울 ‘자가(自家)’ 소유 비율은 42.4%. 전국 평균 57.9%에 훨씬 못 미친다. 여기다 중위 아파트 가격은 4년 새 52%(3억1400만 원)나 껑충 뛰었다. 전국 평균보다 32%, 금액으론 2억500만 원 더 올랐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는 대출)’과 ‘빚투(빚내서 투자)’까지 해도 좀체 ‘벼락거지’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좌절한 서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이를 달래려 나온 게 공급확대 정책이다. 이게 정답일까. 도시계획 부동산 전문가 마강래 중앙대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핵폭탄급으로 공급 늘려도 서울 집값 못 잡는다.” 인구 쏠림이라는 ‘수도권 일극화(一極化)’를 내버려 두고선 백약이 무효라는 경고다. 그러나 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두 후보 귀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둘 다 임기 내 250만호 공급에 집착하고 있다. 물론 나름 균형발전과 분권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재명의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 세종시에서 대통령 취임 등과 윤석열의 행정권한·예산의 파격적 이관 약속 등이 대표적 사례. 너무 한가하지 않은가. 절체절명 지방모순의 처방전치곤 말이다. 으레 선거 때면 나오는 ‘정치적 립 서비스’론 더 이상 안 된다. 정말 ‘혁명적’ 발상을 통한 모순타파가 절실하다.
가장 효과적 수단은 ‘균형·분권 개헌’이다. ‘관습헌법’ 족쇄에 묶여 반쪽이 된 행정수도를 완성하고, 연방제 수준 균형과 자치를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 양원제를 도입해 상원이 균형발전을 맡도록 하고 자문기관 국가균형발전위를 부총리급 정부부처로 못 박으면 어떨까. 입법·재정·인사권의 지방정부 대폭 이양과 진정한 자치경찰제도 개헌 없인 불가능하다. 여기다 부산대 경북대 등 전국 거점 9개 국립대학과 서울대를 하나로 묶는 ‘국립대통합네트워크’까지. 이렇게 헌법이 바뀌면 파장은 가늠키 어렵다. 지방 자력갱생은 물론 인재유출 방지에다 대학서열 타파까지, 말 그대로 일파만파. 반면 권한이 확 줄어들 중앙권력과 학벌 장사로 배 불려온 서울 명문대에겐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기득권 세력의 사생결단식 저항이 불 보듯 빤하다. 대선 후보들로선 무서울 법하다. 그렇다면 지방은 그 이상의 절박감과 결기를 보여줘야 한다. 어차피 이대론 소멸은 시간문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부딪쳐야 한다.
과거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은 ‘얼치기 좌파’ 내부 헤게모니 쟁투의 불쏘시개쯤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규모 통일운동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젠 국가적 과제가 됐다. 정치인이라면 평화통일과 노동존중을 입에 달고 산다. 비수도권 지자체 연합이든, 유권자 연대든, 지역언론 공동투쟁이든, 뭐라도 하자! 이번엔 지방모순 해법 실마리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지방이 산다. 대한민국도 산다.
부산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