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금으로 만든 돈과 은으로 만든 돈이 액면가가 같다면,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은화만 쓰고 금화는 금고에 보관하고 안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은화만 시중에 유통될 것인데, 이런 현상을 경제학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표현한다.
‘돈이면 같은 돈이지 악화가 있고, 양화가 따로 있나’고 하는 의문에서부터 ‘몰아낸다’는 뜻으로 쓰인 구축이라는 어색한 단어까지, 동전을 사용하던 시대에 나온 그레셤의 법칙은 화폐의 기능과 통화량, 교환가치 등을 알고 나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신용카드나 모바일 결제에 익숙한 MZ 세대는 아마 그레셤의 법칙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정부가 화폐 발행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나 화폐를 만들 수 있다면, 물건을 사고팔 때 가치가 떨어지는 악화를 아무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악화는 시장에서 사라지고, 양화만 유통될 것이다. 정부의 간섭이 없는 시장에서는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개입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례는 2005년 8월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도입된 기초의원 정당공천제에서도 볼 수 있다. 정당공천제는 정당에서 후보자를 검증·발굴 할 수 있기 때문에 후보의 난립을 방지하면서 책임정치가 가능하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지방의회가 중앙정치에 예속되고 정치신인에게 진입장벽일 뿐만 아니라 공천 헌금 등의 폐해가 크고, 여야 의원이 동수이거나 단체장과 의회 내 다수당의 정당이 다를 경우 행정이 불안정해지는 등 단점이 더 크다.
얼마 전 모 정당의 대표는 공천 시험을 언급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정당공천제가 도입되고 16년이 지난 지금도 새삼 공천시험제가 거론된다는 것은 그동안 정당공천의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고, 정당공천제의 장점으로 내세운 책임정치 또한 공허한 주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7년 10월 전국 기초의원을 대상으로 코리아리서치가 설문 조사를 한 결과, 공천을 받고 당선된 당시 현역 기초의원 응답자 중 68.8%가 정당공천제 폐지에 찬성했다. 가장 큰 이유는 ‘지방자치의 중앙정치 예속 방지’(56.6%)였고, ‘공천이 당선으로 이어지는 정치풍토 개선’(20.9%), ‘각종 비리와 공천 관행의 근절’(20.5%) 순이었다. 공천을 받아서 당선은 쉽게 되었지만, 당선되고 보니 공천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소신껏 의정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설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당공천제와 중선구제가 도입되고 나서 중앙의 정치적 대립이 기초의회에까지 확산됐고, 지역 현안과 전혀 관련 없는 정쟁에 기초의원이 동원되는 모습이 일상화되었다. 가령 경기 성남시의 대장동 개발 이슈에 전국의 기초의원들이 동원돼 특검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하는 모습은 정당공천제의 폐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야 의원 수가 동수인 의회는 거의 예외 없이 몸살을 앓는다. 당론이라는 깃발 아래 지역과 주민은 온데간데없고, 의회는 그야말로 정쟁의 아레나가 되어 끝없는 치킨 게임을 일삼는다. 양당 체제이면서 중선거구제인 우리나라 기초의원 선거는 여당과 제1 야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가 한 명씩 당선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공천을 받지 못하면 지방선거에 출마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초의원 자질론과 기초의회 무용론이 심심찮게 제기되는 이유가 정당공천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당공천제가 폐지되더라도 후보들은 자신의 정당 활동 경력을 내세워 선거운동을 하겠지만 유권자는 개중 낫다고 생각되는 후보를 내 손으로 직접 선출할 것이고, 선출된 기초의원들은 사실상의 공천권자인 주민을 두려워하면서 의정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올해로 30주년이고, 지방자치법이 전면 개정되어 새로운 지방자치 시대로 도약하는 이때 지방자치의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인 기초의원 공천권을 과감하게 내려놓는 국회의원의 용단을 기대해본다.
부산 해운대구의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