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발생한 스페인독감은 세계 인구 16억 명 중 5억 명이 걸리고 5000만 명이 사망하는 등 20세기 가장 강력한 전염력과 치명률을 지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이름은 ‘스페인독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발생지는 스페인이 아니다. 미국 또는 영국, 중국 기원설이 있는데 그 중 미국 캔자스 발병설에 무게가 실린다. 캔자스 미군 기지에서 발생한 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격하게 전 세계로 퍼졌다는 내용이다.
참전국이 감염병 확산과 관련한 언론 통제에 나선 사이, 중립국이었던 스페인만 위험 상황을 상세히 알리자 스페인에서 유독 심한 질병으로 오해된 것이다. 스페인은 감염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했다는 이유로 영원히 고통받고 있다. 이후에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지역명이 들어간 감염병은 계속 나왔지만 2015년 이후 자취를 감췄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질환명을 정할 때 지역 인종 직업 등 낙인이 될 만한 것을 제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를 팬데믹 속으로 빠뜨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역시 초기엔 중국 우한에서 발병했다 하여 ‘우한폐렴’으로 불렸다가 WHO에 의해 ‘COVID19’, 즉 코로나19로 바뀌었다.
코로나19에 변이가 계속 생기면서 질환 명칭을 둘러싼 논란이 최근 다시 불거졌다. WHO는 발생지 낙인을 방지하고자 변이가 나올 때마다 그리스 알파벳 글자 순서대로 이름을 짓는데, 12번째 글자인 ‘뮤(μ)’ 변이까지 나왔으므로 새 변이는 13번째 글자인 ‘뉴(ν)’가 될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WHO는 뉴와 그다음 글자인 ‘크시(ξ)’마저 건너뛰며 15번째 ‘오미크론’으로 확정했다. 뉴는 신종을 뜻하는 ‘New’와 혼동될 수 있고, 크시는 영어 철자가 ‘Xi’로 중국 시진핑 주석의 시(Xi)로 읽힐 수 있어 피했다는 풀이다. WHO 측도 “흔한 성씨인 ‘Xi’를 피했다”며 사실상 시인했다.
WHO의 ‘세심한 배려’에 ‘시 변이’가 사라진 사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오미크론 변이의 진원지라는 지역 낙인으로 고통받는다. 재빨리 변이의 존재를 확인, 알렸으나 돌아온 건 남아공 등 남아프리카 국가를 상대로 한 세계 각국의 빗장 걸기였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코로나19 진원국으로 의심받는 중국은 “아프리카에 코로나19 백신 10억 회 분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서방국가의 백신 독점, 이로 인한 백신 불평등이 오미크론을 출현시켰다는 비판이 아프리카 국가 중심으로 나오자 이 일대 ‘반(反)서방’ 기류를 틈타 기민하게 파고든 셈이다. 인터셉트 타이밍이 참 절묘하다.
이선정 신문국 에디터 sj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