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붕괴 이후 30여 년 간 유지되어 온 평화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침공으로 깨졌다. 물론 1990년에 발발한 걸프전이 있긴 하지만, 이번과 같이 미국과 러시아라는 거대세력간의 정체성 충돌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몇 가지 특이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구 냉전구조라는 망령의 재도래 조짐이다. 1989년 공산진영이 붕괴되면서 냉전체제는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았다. 이를 두고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책 ‘역사의 종언’에서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의 최종적 승리가 민주주의 정치를 정치체제의 최종적 형태로 자리 잡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치 정체를 둘러싼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이번 사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우크라이나와 이를 지지하는 서방세력과 권위주의를 표방하는 푸틴의 러시아 간의 정체성 대결적 성격이 농후하다.

둘째, 구 냉전적 성격이 강한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권위주의적 체제를 가진 국가라고 해서 무조건 러시아 편을 드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지난 달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여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브로맨스’를 과시했다. 그럼에도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에서의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을 위해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유엔 긴급총회에서 중국은 기권 표를 던졌다. 그러면서 중국은 “각국의 주권 및 영토보전을 존중한다”는 발언을 했다. 물론 동시에 “러시아의 안보 우려 입장도 중시한다”고는 했지만, 러시아가 기대했을 법한 반대 표는 던지지 않았다. 이는 국제정치에서 명분의 중요성을 새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무리 비슷한 진영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침략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옹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열기가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러시아 국민조차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하고 있다.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의 대러시아 비판은 특히 괄목할 만 하다. 소련 지배하에서의 자유 억압을 경험한 리투아니아는 이미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서유럽국가를 방문해 대러시아 제재 강화를 앞장서 촉구하고 있다. 전쟁 발발 며칠 전에는 직접 키이우로 날아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며 대러시아 대동단결을 과시했다. 유럽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도 시민차원의 반러시아 데모가 도심을 메우고 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국제적 반발과 고립은 푸틴을 적잖게 당황케하고 있을 것이다.

넷째, 금융제재 석유수입금지 조치 등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가 차원의 대러시아 제재에 더하여 러시아 국민의 생활에 직접적 불편을 주는 조치가 개별 기업,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국적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비행기가 미국의 보잉사 (334대)나 유럽의 에어버스사 (304대)에서 제작된 것인데, 이들 회사는 “더 이상 비행기 보수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광활한 국토를 가진 러시아에서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되면 이동은 마비될 것이다. 애플사도 러시아에서의 자사제품 판매금지와 결제 서비스인 ‘애플페이’ 사용제한을 발표했다. 그렇게 될 경우 러시아인들은 당장 지하철 탑승은 물론 소비활동에도 큰 불편을 겪게 될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19세 대학생은 푸틴의 측근으로 알려진 러시아 부호들이 타고 다니는 개인 비행기를 모두 추적할 수 있는 앱을 공개함으로써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하고 있다.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개인과 개별회사가 가진 엄청난 힘을 잘 보여 준다.

다섯째, 우크라이나인들의 애국심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이 돋보이는 전쟁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가수호에 대한 죽음을 각오한 진두지휘와 하루도 빠짐 없이 발신하고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한 대국민 메시지는 극심한 위기와 불안에 빠진 자국민을 똘똘 뭉치게 하고 있다. 또한 외국에 사는 젊은이들이 속속 귀국하여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며 싸울 마음 없이 동원된 러시아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현상이 분단국 우리나라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으면 국제환경은 우리에게 크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점이다. 신고(辛苦) 끝에 새 정부를 출산한 우리 국민 모두가 곱씹어 보아야 할 타산지석의 소중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