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이자 사회 비평가인 제인스 하워드 쿤슬러는 2011년 출간한 책 ‘장기 비상시대’에서 화석 연료인 석유 없는 세상을 말한다. 그는 책에서 “화석 연료로 인한 풍요는 인류에게 딱 한 번 허락된 사건일 뿐이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인류가 최근 100여 년 사이에 이룩한 엄청난 문명은 모두 값싼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우주를 탐사하는 최첨단 과학 기술과 의료 발전, 심지어 급격한 인구 팽창을 가능하게 했던 ‘녹색혁명’까지 모두 석유가 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쿤슬러의 논리는 극단적이다. 그는 앞으로 30년 정도 후 전 세계에 석유가 한 방울도 남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석유 대체 에너지원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은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석유 고갈 후 현재의 문명은 붕괴되고 그에 따른 단절의 시대가 닥친다. 그러면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을 재편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쿤슬러 주장을 100% 수용할 필요는 없다. 다만 현재 인류가 누리는 풍요와 최근 100년 사이 이룩한 문명이 화석 연료로 가능했다는 말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쿤슬러는 석유 고갈 후의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지만 인류는 다른 방향의 암울한 미래를 맞이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화석 연료의 고갈보다 무서운 화석 연료로 인한 기후 위기 말이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탄소 배출과 지구 온난화, 기후 변화, 그리고 기후 위기는 연결 선상으로 보면 된다.
한때 기후 변화란 말을 많이 썼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섰다. 그동안 기후 위기를 미래의 문제로 치부하고 뭉그적거렸다. 그러는 동안 미래가 현재로 성큼 다가와 버렸다. 이젠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논할 때 굳이 해외 사례를 언급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국회에서 ‘한반도 대홍수 시뮬레이션’ 영상이 공개됐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2030년 부산은 수영강을 따라 벡스코와 센텀시티, 광안리 일대가 침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2030부산엑스포 후보지인 북항이 침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불과 8년 후의 일이다.
앞서 지난 8일 서울에 115년 만의 폭우가 내렸다. 이날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기상청 관측소에서 측정한 강수량은 381.5㎜였다. 1907년 서울의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후 최다였다. 비공식적으로는 기상 관측 이전 시기까지 포함해 서울에서 가장 강력한 폭우가 내린 날로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록 다음에 따라붙는 인명 피해다. 반지하에서 마지막까지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이들을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기후 위기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체감했다.
해외는 더 심각하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는다는 건 이젠 뉴스도 아니다. 최근에는 알프스 빙하가 녹으면서 예상치 못한 피해가 곳곳에서 발생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빙하를 지키기 위해 방수포를 덮으며 안간힘을 쓰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 알려진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국립공원에 1000년에 한 번 발생할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 충격을 줬다.
이처럼 기후 위기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상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기후 위기의 공포를 목격한 청년 세대 사이에서 “우리나라가 저출생으로 멸망하기 전에, 지구가 기후 위기로 멸망할 것 같다”는 말까지 떠돈다고 한다.
그동안 인류는 앞선 세대로부터 이어받은 문명과 번영을 후손들에게 더 발전시켜 물려줘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은연중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한가로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후손에게 어떤 것도 물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의미심장한 소식이 전해졌다. 기후 위기로 고통받는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가 화석 연료를 완전히 퇴출하기로 했다. 2030년까지 자국 내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누아투는 태풍에 따른 이재민 피해와 해수면 상승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기후 위기 최대 피해국 중 한 곳이다.
바누아투처럼 이젠 더는 미룰 수 없다. 미루는 시간만큼 후손들의 미래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이 자리에서 굳이 논하지 않겠다. 그동안 각종 연구 결과 보고서 뉴스를 통해 수없이 전해졌다. 중요한 건 행동이다. 화석 연료로 이룩한 문명과 풍요의 일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불편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후손들에게 무언가 물려주려고 한다면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도 늦었다.
김희국 신문국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