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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윤의 대안 모색] 다시 블랙리스트

장병윤 한살림부산 이사장

  • 장병윤 한살림부산 이사장
  •  |   입력 : 2022-12-15 19:57:33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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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창작 활동에 대한 당국의 통제로 ‘윤석열차’가 파열음을 내던 무렵, 부산에서도 검열의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최근 드러난 부마민주항쟁 기념행사의 ‘선곡 변경’ 사건이 그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서 예술인의 창작활동까지 정치적 이해로 옭아맸던 ‘블랙리스트’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보도에 따르면 가수 이랑이 부마항쟁 43주년 기념식에서 ‘늑대가 나타났다’를 부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행정안전부가 해당 곡에 문제를 제기했고 급기야 출연이 무산됐다고 한다. 행안부의 압박을 받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 ‘상록수’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으나 공연감독과 가수가 이를 거절하면서 교체됐다는 것이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마녀가 나타났다. 부자들이 좋은 빵을 전부 사버린 걸 알게 된 사람들이 막대기와 갈퀴를 들고 성문을 두드린다. 폭도가 나타났다. 배고픈 사람들은 들판의 콩을 주워다 먹어 치우고 부자들의 곡물 창고를 습격했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의 노랫말이다. 중세 유럽의 어두운 풍경, 절대권력의 압제 아래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 민중의 처참한 삶을 그렸다. 현실에 분노한 헐벗은 이들이 마녀와 폭도, 늑대로 내몰리는 부조리를 잘 담아낸 노랫말에 부마항쟁 당시 우리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겹친다.

유신독재의 억압적 통치가 국민의 일상을 옥죄고 개발독재의 한계를 드러내며 민생이 파탄 나던 시절,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 서민의 삶은 중세 민중의 암담한 현실을 방불케 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와 그 이태 전 있었던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한 해 사이에 석유제품 59%, 전기요금 39% 등 물가 폭등은 서민 가계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반면 중공업 정책으로 선회한 정부는 재벌과 금융에 특혜를 주고, 힘겹게 한 푼 두 푼 모은 서민의 저축을 동결시켰다. 경공업 중심의 부산과 마산은 소외돼 실업률이 치솟고 기업이 무더기 도산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다.

중세나 유신 말기의 암울하고 절박했던 상황 속에서 민중의 분노는 시대정신으로 표출됐다. 늑대와 마녀, 폭도들로 불리던 억눌린 자들의 저항은 중세를 변혁시키고 유신독재를 무너뜨렸다. 차별과 불평등에 맞선 민중의 불굴 의지를 은유한 노랫말은 부마항쟁의 취지를 현재화하고 역사적 의미를 젊은 세대와 공감하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부마항쟁재단과 가수의 의기투합은 당국의 문제 제기에 물거품처럼 스러졌다.

대통령이 참석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 뒤부터 행안부는 행사의 기획 의도보다 불편한 노랫말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사 내용을 불온시한 것이리라. “미래지향적인 밝은 느낌의 기념식이 됐으면 좋겠다”고 만했다는 행안부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간섭이자 검열이 아닐 수 없다. 재단의 운영예산을 틀어쥔 당국의 그러한 반응은 강력한 압박으로 작용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 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일련의 간섭과 통제는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경호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고등학생의 눈으로 권력의 행태를 풍자한 ‘윤석열차’ 사태에선 문체부가 예산삭감을 경고했을 뿐 아니라 여권이 들고일어나 표절이라고 떼지어 공격했다. 버스정류장에 대통령을 풍자한 포스터를 붙인 작가는 옥외광고물법 위반으로 피소됐고, 권력에 좌우되는 경찰과 김건희 씨의 논문표절 논란을 풍자한 만화작품이 출품 뒤 석연찮은 이유로 전시회에서 빠졌다. 만화작품 전시 누락은 행사 주최 측의 내부 검열 정황까지 드러나 더 충격적이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사회적 기억사업’ 예산이 내년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도 석연치 않다.

국가권력의 예술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다. 특히 지원예산을 수단으로 삼은 통제가 어떻게 예술창작의 자유를 파괴하는지 블랙리스트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섰던 저항정신을 기리는 부마항쟁재단마저 당국의 간섭에 무릎을 꿇은 이번 사건에 비춰볼 때, 창작활동에 대한 당국의 규제가 예술인에게 폭력적 억압으로 작용할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이러한 연유로 지난 9월 ‘국가기관 등은 예술을 검열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확하게 규정한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시행된 것이다. 이 정부 또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것은 예술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 아닌가.

하지만 최근 꼬리 문 예술창작 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 최고 권력자의 심기 경호로 비치는 일련의 행태들은 관련법 취지나 정책의 기조를 한순간에 망가뜨린다. 비판적 예술창작 활동에 대한 권력의 억압은 오랫동안 피와 땀으로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를 짓밟는 일로, 역사를 후퇴시키고 나라의 품격을 허무는 어리석은 짓이다. 다시 블랙리스트의 악령이 움찔거린다. 그것을 막아내는 것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 지키기 위한 예술가들의 강한 의지와 예술을 누리는 시민의 끊임없는 관심과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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