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인문학 칼럼] 신정과 설날 사이의 단상

유구한 역사 가진 설날…일제에 의해 구정 격하

국민 힘으로 전통 지켜 세배 등 풍속 이어가야

류승훈 부산시립박물관 전시운영팀장

  • 류승훈 부산시립박물관 전시운영팀장
  •  |   입력 : 2023-01-04 19:44:26
  •  |   본지 19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며칠 전 2023년 신정을 보냈다. 신정이 되자 계묘년 토끼띠 이야기와 새해 운세로 시끌벅적했다. 띠의 근간이 되는 12지지(地支)는 음력이나 입춘을 기준으로 하므로 신정부터 토끼띠 이야기를 하는 건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엄연히 2023년 새해가 밝았는데 설날까지 기다려 토끼띠 이야기를 하자니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정부터 설날까지 새해인지 지난해인지 구분이 안 되는 어정쩡한 시간을 보낸다. 달력은 양력을 따르면서도 명절은 음력을 고수하는, 현대적 생활과 문화적 전통의 혼재를 실감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중과세(二重過歲)를 떠올려보면 이 정도의 혼재는 약과다. 나는 20대까지도 신정(新正)과 구정(舊正)에 설을 두 번 쇠는 이중과세의 시절을 지냈다. 정부는 이중과세를 낭비 풍속의 하나로 지목하고 국민 의식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우리집에서도 정부의 이중과세 방지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설을 똑같이 두 번이나 쇨 수는 없는 법이다. 두 번의 설을 합리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큰 집과 작은 집으로 나눠서 지냈다. 요컨대 작은집이었던 우리집에서는 신정을 쇠고, 큰 집에서는 구정을 쇠었다.

수천 년 이어져 왔던 민족 설날 구정의 풍속은 약화되지 않았다. 큰 집에서는 고조부와 증조부의 차례를 지내서인지 우리집에서 쇠는 신정보다 훨씬 많은 친지가 모였다. 당시 구정은 공휴일이 아니었음에도 큰 집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손님들이 모였고, 명절 분위기도 더 왁자지껄했다.

우리 민족에게 신정이란 새로운 설이 생겼을 때는 1896년이었다. 서양의 역법인 태양력을 받아들이면서 양력 1월 1일이 또 하나의 설이 된 것이다. 새로운 설이 탄생했지만 대한제국은 백성들에게 신정을 강요하거나 구정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예전대로 설이라면 당연히 음력 1월 1일이었고,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는 풍속도 설날에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국가라 해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설을 순식간에 바꿀 수 없었다. 수천 년 동안 우리 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가 어떻게 한순간의 바람에 쉽게 흔들릴 수 있겠는가.

고대 사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달을 통해서 시간의 변화를 파악했다. 달은 그 자체로 시간이고 세월이었다. 늦은 밤을 밝고 환하게 비춰주는 달은 하루가 갈 때마다 차고 일그러졌으며, 그 모습은 시간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렇게 정리된 역법이 태음력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정월 초하룻날 설은 세시풍속의 기점이었기에 백성들은 각별하게 받아들였다. 이날에는 깨끗한 마음으로 조상신을 모시고, 어른들에게 첫인사를 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의 전통은 우리 문화의 신성한 토대이자 웅대한 거목이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일본은 우리나라 전통에 대해서 적지 않은 핍박을 가했다. 우리 민족의 설에 구정이란 딱지를 붙이고, 일본처럼 신정을 쇨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일제의 무모한 압력 속에서도 백성들은 계속해서 구정을 설로 보냈다. 국가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신정과 그럼에도 식민지 백성들이 옛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문화의 충돌 속에서 이중과세가 생겨났다. 일제는 ‘이중과세는 낭비’라고 비판하면서 전통 설 문화를 폐기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 정부도 일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신정과 구정 사이에서 이중과세라는 비판의 화살을 국민에게 쏘아댔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정부는 신정을 쇨 것을 요구하고, 국민은 전통에 따라 구정을 쇠는 설의 이중 현상이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정부가 강력한 음력설 전통에 백기를 들었을 때는 태양력을 제정한 지 90여 년이 지난 1985년이었다. 정부는 음력설을 공휴일인 ‘민속의 날’로 지정하고, 이중과세 방지정책을 전격 수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설을 ‘민속의 날’로 지정했지만 국민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설 뿐만 아니라 추석 대보름 단오 등 모든 전통적 세시풍속일이 민속의 날이 아니겠는가. 결국 3년 만에 민속의 날은 폐지되었으며, 1989년에는 구정이 당당히 설날로서 옛 지위가 복권되었다. 이때부터 신정을 쇠던 우리집도 설날에 차례를 지내게 되었다. 이중과세라는 말도 언제 그랬냐 싶게 없어졌음은 물론이다.

2023년의 설에도 나는 민족 대이동의 흐름에 합류할 예정이다. KTX 열차가 운행되기 전까지 나는 자가용을 몰고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를 거북이처럼 다녔다. 극심한 교통 혼잡 속에서 우리는 왜 이 힘든 민족 대이동에 늘 뛰어드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혹여 우리도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회귀 본능의 연어와 같은 것일까. 이미 이중과세의 기억도 희미해졌건만 해마다 신정과 설날 사이 불쑥 찾아오는 이 단상을 지울 수가 없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미인증' 해외직구 금지 논란에…정부 "당장 시행 아냐"
  2. 2국과수서 ‘김호중 사고 전 음주 판단’ 감정 결과 나와
  3. 3정부, 'R&D 예타폐지 부작용' 우려에 "전문검토 기능 강화"
  4. 4[날씨 칼럼]봄바람 주의보, 봄철 강풍에 주의하세요
  5. 5국제유가 '우하향' 추세에 전국·부산 기름값 동반 하락
  6. 6뉴욕증시 다우지수 첫 4만선 돌파 마감 ‘역대 최고’
  7. 7부산, 울산, 경남 대체로 맑고 낮에는 ‘초여름 더위’
  8. 8가수 테이 고향 울산시 홍보대사 됐다
  9. 9석유관리원 "전국서 '품질관리 주유소' 운영…ℓ당 30원 저렴"
  10. 10준공무원 처우에도 구인난…유례없는 버스운전사 채용설명회
  1. 1국회의장 후보에 민주 우원식…추미애 꺾고 이변(종합)
  2. 2국힘 ‘라인 사태’ 적극 대응으로 전환…장제원 “다음주 초 과방위 회의 열 것”(종합)
  3. 3국회부산도서관, 市 의정정보서비스 강화 추진
  4. 4‘친명’ 과도한 권력 집중에 견제구…우원식 첫 시험대는 국회 원 구성
  5. 5[속보]북한, 탄도미사일 발사…25일만에 무력 도발
  6. 6지역구로, 중앙당으로…부산 與 재선 5인 보폭 넓혀 존재감
  7. 7국힘 수석대변인에 곽규택·김민전 내정(종합)
  8. 8與 "전국민 25만 원, 선별적 지원도 반대"
  9. 9우원식, 추미애 누르고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
  10. 10“교권 존중 받는 정책 만들 것” 여야 한목소리
  1. 1'미인증' 해외직구 금지 논란에…정부 "당장 시행 아냐"
  2. 2정부, 'R&D 예타폐지 부작용' 우려에 "전문검토 기능 강화"
  3. 3국제유가 '우하향' 추세에 전국·부산 기름값 동반 하락
  4. 4석유관리원 "전국서 '품질관리 주유소' 운영…ℓ당 30원 저렴"
  5. 5옛 미월드 부지 ‘생숙’ 추진, 시공사 리스크가 발목 잡을라
  6. 6메가마트 남천·NC百 서면, 폐점 앞두고 눈물의 고별전
  7. 7공유수면 점·사용료 울산 경남의 7배…부산 조선업계 한숨
  8. 8산은 ‘부산화’ 속도낸다…2차 공공기관 이전 물꼬 터야
  9. 94월 부동산지수 한 달 만에 반등(종합)
  10. 10[속보]간암 신약 HLB ‘리보세라닙’, 美 FDA 허가 불발
  1. 1국과수서 ‘김호중 사고 전 음주 판단’ 감정 결과 나와
  2. 2[날씨 칼럼]봄바람 주의보, 봄철 강풍에 주의하세요
  3. 3부산, 울산, 경남 대체로 맑고 낮에는 ‘초여름 더위’
  4. 4준공무원 처우에도 구인난…유례없는 버스운전사 채용설명회
  5. 5고영삼의 인생 이모작…한 번 더 현역 <51>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 스님
  6. 6“글로벌허브 부산, 세계적 수준 교육 생태계 필수”
  7. 7국제신문 제작 '영화 청년, 동호' 칸영화제서 세계인에 첫선
  8. 8“돌봄공백 해소 부산형 늘봄, 304개 모든 초등학교 운영”
  9. 9‘김 여사 수사 담당 보직’ 檢 중간 간부 후속 인사도 속도
  10. 10감형 노린 ‘기습공탁’ 막는다…피해자 의견 의무 청취
  1. 1KCC 농구단이 원하면 뭐든지…市, 사직체육관 싹 뜯어고친다
  2. 2수영초 야구부, 대통령배 초대 챔피언 아깝게 놓쳤다
  3. 3‘10-10 클럽’ 도전 손흥민, 화려한 피날레 장식할까
  4. 4사브르 ‘뉴 어펜저스’ 3연속 올림픽 단체전 金 노린다
  5. 5‘축구 추락 책임론’ 정몽규 협회장, AFC 집행위원 선출
  6. 6셀틱, 스코틀랜드 프로축구 3연패
  7. 7이정후 어깨에 심각한 구조적 손상
  8. 8KCC 안방서 우승 뒤풀이…“내년에도 팬들 성원 보답”
  9. 9애스턴, 토트넘 밀어내고 41년만의 꿈 이루다
  10. 10동의대·부산스포츠과학센터 업무협약
우리은행
후보가 후보에게 묻는다
부산 서동
4·10 총선 지역 핫이슈
원도심 숙원 고도제한
강동묵의 디톡스 [전체보기]
노동자 건강을 위한 국제사회의 경향
소규모사업장 중처법, 투약 중단이 필요한가?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옛 부산세관 복원, 진정한 새로운 전통이 되길
부산 영도, 낭트의 낭트 섬을 보자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과학계의 스승과 제자
탄소중립으로 가는 길
국제칼럼 [전체보기]
AI시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생성형 AI시대와 저작권
기고 [전체보기]
해외직구식품, 현명한 선택과 소비가 필요하다
‘질병x’ 대유행 예방과 대응, 대만과 함께
기자수첩 [전체보기]
영화의전당 대표 연임…소통 외치는 현장에 귀 기울여야
김갑수의 생각 [전체보기]
이재명 대표께
김석환의 이미 도착한 미래 [전체보기]
아직 명당 덕을 덜 본 것일까?
노무현이 옳았다
김용석의 시사탐방 [전체보기]
신문은 살아 있고, 칼럼은 말을 건다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디아스포라의 노래 영천아리랑
우리 융복합 음악의 시초 고구려악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소통을 이기는 무기는 없다
선한 영향력
데스크시각 [전체보기]
가덕신공항과 박형준의 정치적 미래
도청도설 [전체보기]
김동호와 칸
반야용선
메디칼럼 [전체보기]
일하는 사람의 1차 의료, 근로자 건강진단
100세시대의 건강관리법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조식전쟁
미쉐린 가이드와 ‘부산의맛’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뇌력(腦力)을 키우는 다섯 가지 비결
뇌, 팩트 체크!
사설 [전체보기]
올해만 13명 사망, 조선소 안전대책 다시 짜라
우원식 국회의장 후보, 민심 따라 협치 나서길
세상읽기 [전체보기]
사라지는 중간, 중산층을 위한 도시
기후 변화로 뜨거운 ‘지구 응급실’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의대 입학정원 갈등의 올바른 해법
우리 시대의 올바른 복지 원칙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기회의 바다, 우리네 함장은 어디로 키를 잡을까
부산항, 글로벌 물류 허브 플러스 알파
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전체보기]
12월의 기도편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경제문제가 풀려야 인구문제가 풀린다
중국의 한국시장 시장교란
인문학 칼럼 [전체보기]
호모 사피엔스의 바다
세상을 뒤흔든 춤
전호환의 두잉세상 [전체보기]
한국교육의 새 지평을 여는 IB교육학회 창립
‘자신과의 경쟁’이 ‘경쟁 교육’ 대안이다
차재원의 정치평설 [전체보기]
비례대표 제도는 죄가 없다
‘자객공천’ 유감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오페라 와인
와인이란
특별기고 [전체보기]
부산의 위대한 도전은 계속 된다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낭만오페라의 종언! 푸치니
정명훈과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처음 보는 ‘무릉도원’
무호 이한복의 ‘운룡도’
CEO 칼럼 [전체보기]
드론으로 변화할 부산의 미래
특별한 장점과 잠재력 지닌 사람들
  • 국제크루즈아카데미
  • 걷기축제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