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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그림산책] 이당 김은호의 ‘매란방’

  • 황정수 미술평론가
  •  |   입력 : 2023-02-05 19:55:35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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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개봉해 공전의 화제를 몰고 온 ‘패왕별희(霸王別姬)’라는 영화가 있었다. 제목은 ‘초패왕 항우가 우미인과 이별하다’는 뜻으로 중국 경극 중 한 편이다. 영화 속 경극의 여주인공 우미인 역은 남장 여인이 했는데, 이 영화배우가 바로 유명한 장국영(張國榮, 1956~2003)이었다. 장국영이 맡은 역할은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을 재연한 것이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중국 근대기 최고의 경극배우인 매란방(梅蘭芳, 1894~1961)이다. 매란방은 경극배우 집안에서 태어나 8살에 기예를 배우기 시작, 20세 무렵에 이미 명배우로서 이름을 떨쳐 경극계의 제1인자가 된 천재적 인물이다. 푸른 도포를 입은 수려한 모습과 아름다운 목소리는 경극사상 으뜸으로 손꼽히며, 이때 공연했던 대표작 중의 하나가 ‘패왕별희’였다.

김은호의 ‘매란방’.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매란방의 인기는 중국을 넘어 한국에까지 소문이 났다. 인물화의 명인으로 불리는 한국 최고의 화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도 매란방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1929년 김은호는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온 단우(丹宇) 이용문(李容汶)의 도움으로 친구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공연하고 있던 매란방 일행을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먼저 그 소식을 들은 허백련은 김은호가 매란방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부리나케 김은호에게 달려가 이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매란방이를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네. 나라면 몰라도 미인을 그리는 자네가 북경까지 와서 그 유명한 미남배우 매란방을 못 보고 가서야 쓰겠나? 공연 날짜가 하루 남았다는 거야. 통역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장표를 사주겠다고 하더군.”

이 말을 들은 김은호는 가슴이 설레었다. 미인도를 주로 그리는 자신에게는 새로운 영역을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 장안은 온통 매란방 이야기로 가득했다. 김은호는 웃돈까지 줘가며 가장 보기 좋은 앞자리에 앉았다. 공연을 본 김은호는 깊은 감동에 빠졌다. 여성보다 더 고운 살결, 표정, 몸동작 모두 절대미녀 이상이었다. 화장을 했다지만 너무나 희고 보드라운 피부와 매혹적인 자태에 주인공이 남자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김은호는 그때 본 장면을 기억하여 여러 장의 스케치를 해온다. 귀국하여 매란방의 모습을 잊지 못한 그는 북경에서 그려온 스케치와 당시 인기리에 팔리던 매란방의 사진을 바탕으로 화폭에 옮긴다.

김은호의 채색화 작품 ‘매란방’은 매란방이 춤추는 모습의 전신상을 그린 것이다. 채색이 화려하고 치밀하여 군더더기가 없다. 여장 남성의 오묘한 느낌이 나는 갸름한 얼굴의 묘사가 매우 뛰어나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하다. 또한 춤추며 휘날리는 무복의 화려한 색감이 신선하고, 옷 주름 등의 표현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춤추는 인물의 몸동작에서 기운생동 없이 뻣뻣한 것은 이 작품의 약점이다. 동세보다는 세밀한 묘사에 더 중점을 두는 북종화식 채색화의 한계인 듯하다. 그러나 한국 채색화단에서 이만큼 섬세하고 화려하면서도 격조를 갖춘 작품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면에서 매우 소중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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