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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신발을 신으며 배우는 겸손

이해인 수녀·시인

  • 이해인 수녀·시인
  •  |   입력 : 2023-03-16 18:50:47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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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일 아침 일어나서 신발을 신을 적마다 ‘오늘도 새롭게 희망을 신는 거야’ ‘신발을 신은 사람답게 씩씩하게 걸어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고맙게 성실하게!’라고 다짐해보곤 합니다.
“1960~1970년대 어느 날 광안리 해변으로 산책 나와 찍은 사진”이라며 이해인 수녀가 보내온 흑백사진. 본문에서 이해인 시인은 “어쩌다 바닷가에 다녀오는 길엔 신발가게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고 떠올린다.

신발을 신으며



발에 신으면 발신이지

왜 신발이냐고 우기던

어린 조카의 말을 생각하며

신발을 신습니다

무거운 나를 가볍게 지고 갈

나의 신발에게 늘 고맙다는 말

잊지 않으면서 하루의 길을 가면

더욱 정겹게 살아오는 나의 이웃

반갑게 웃어주는 거리의 풍경

날마다 낮은 자세로 신발을 신으면

높은 곳에 있던 행복도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사뿐히 겸손하게 내려옵니다



이름을 쓴 신발, 시를 써서 넣어놓은 신발. 신발은 내가 되고 시가 된다.
발에 신으면 발신이지 왜 신발이냐고 우기던 어린 조카 권태균도 이젠 40대의 어른이 되었는데 발신이라 우기던 때가 생각나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합니다. 며칠 전 부산진구 개금동에 있는 신발박물관(한국 유일의 신발박물관인 한국신발관)에 다녀오며 기차표·말표·국제 고무신 등등 상표를 보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세상 물정 잘 모르는 갈멜회(봉쇄수도원) 수녀님들이 모처럼 외출 한 길에 기차표 신발가게에 들어가 ‘기차표 사러 왔는데요’ 했다는 일화를 그 수도원에 몸담고 계시던 언니 수녀님에게서 전해 듣고 많이 웃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신발박물관에는 유명한 문화예술인들이 사인한 신발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저에게도 한 켤레 달라고 하여 준비하는 중에 신발장에 있는 신발들을 다 꺼내보기 시작하다가 반들 반들 윤 나게 닦아주니 신발들도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도자의 신분이다 보니 거의 다 검정이나 회색이지만 더러는 푸른색과 흰색 실내화도 있습니다.

신발의 용도도 다양해서 어느 것은 성당에 기도하러 갈 때, 어느 것은 잠시 산보하러 갈 때, 어느 것은 멀리 여행 갈 때, 그리고 또 어느 것은 병원에 입원하러 갈 때 신도록 정해 두었습니다.

어쩌다 바닷가에 다녀오는 길엔 신발가게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하나 둘씩 문을 닫으니 안타깝고 서운해서 어느 날 부산에 신발산업이 좀 더 번창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발박물관 견학을 일부러 갔던 것입니다.

명절날 현관에 신발이 많으면 괜히 흥분되고 기뻤던 기억도 나고 피란 시절 고모가 사다 준 빨간 운동화가 하도 이뻐 끌어안고 잤던 고운 추억도 있습니다. 이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우리집에 신발이 많을 때면’이라는 동시를 한 편 적어보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다녀와서 우리집 현관에

신발이 많은 날은

‘손님이 많이 오셨구나’ ‘누가 오셨을까?’

몹시 궁금하고 설레는 내 마음

설날 추석날 어른들의 생신날

일가친척들이 많이 모이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신발을 세어봅니다

반들 반들 윤이 나는

아저씨들의 검은 구두

뾰족하고 굽 높은 아줌마의 구두

시골 흙이 묻은 할머니의 하얀 고무신

언니 오빠들의 산뜻한 운동화

아가들의 앙증스런 꽃신

신발 수만큼이나 나의 기쁨도 늘어납니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와

오순도순 정다운 이야기가

방 안에선 쉬임 없이 흘러나오고

신발들은 덩달아 할 이야기가 많은 듯

서로를 바라보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신발에 대해 여러 편의 시들을 썼지만 아주 오래전에 쓴 이 시를 많은 독자분이 좋아하고 특히 연말이 되면 자신을 성찰하는 일종의 ‘반성일기’로 좋아해 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낡은 구두



내가 걸어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켤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버릴 수가 없다

몇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준 고마운 그를!



이미 보관하고 있는 신발들 중에서 신으면 매우 무게감 있고 안정감 있어 넘어짐을 예방해 줄 것 같은 편한 신발을 다시 관심 갖고 찾아 신으니 든든하고 기쁩니다.

좀 더 똑바로 걷지 못한다고 핀잔을 주는 동료 수녀들의 충고도 기억하면서 저는 이 신발에 왼쪽은 ‘중용’ 오른쪽은 ‘조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열심히 하루의 길을 가야겠습니다. 신발을 신고 싶어도 이젠 다시 신을 수가 없는, 저 멀리 세상 떠난 가족 친지 이웃들, 지금 이 순간에도 속히 자신의 신발을 신고 외출할 날을 기다리며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기억하면서 물끄러미 신발을 바라보는데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하얀 꽃으로 떨어집니다. 신발의 또 다른 이름은 겸손이라고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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