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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그림산책] ‘남농산수화’의 탄생

  • 황정수 미술평론가
  •  |   입력 : 2023-04-30 19:40:46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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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小癡) 허련(許鍊), 미산(米山) 허형(許瀅)에 이어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어받은 남농(南農) 허건(許楗)은 3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조 남종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술 세계로 나아갈 꿈을 꾼다. 당시 화단은 일제 강점으로 신남화(新南畵)라 불리는 일본화법이 유입되어 새로운 미술 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남종화에 서양화법이 더해진 이 화법은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허건 ‘산수도’. 개인 소장
더욱이 동생 허림(許林)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보이자, 허건은 자신의 보수적인 미술 세계에 대해 심한 회의를 느낀다. 목포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허건은 그동안 배워온 그림 세계를 혁파할 결심을 한다.

일본에서 유입된 미술 책을 보기도 하고, 허림이나 임신(林愼) 등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역 화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미술 재능이 뛰어난 허건은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는 등 환골탈태한다. 하지만 새로운 미술세계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나, 늘 마음은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 순간 허건은 일본화법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화풍을 담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고 애를 쓰기 시작한다.

허건은 새로운 화풍에 대해 고민을 하다 서울에 올라와 당시 남종화계의 주류였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과 어울리며 새로운 작품 형식을 모색한다. 청전화숙에서 정종여 배렴 등과 어울리며 새로운 양식의 산수화를 구상한다. 몇 년의 각고 끝에 허건은 드디어 자신만의 개성적인 산수화를 만들어낸다. 일본 신남화 화풍을 버리고 집안에서 내려온 전통 산수화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필법을 더해 새로운 ‘남농산수’를 개발한 것이다. 비교적 짧은 붓 선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산수를 구성하고, 자연 속에서 고기를 잡거나 뱃놀이를 하는 인물을 배치했다.

이 새로운 화풍은 한국인, 특히 남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남농’이란 호는 한국 남종화의 상징이 되었고, ‘허건’이란 이름은 남도화풍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허건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화파를 이루었다. 또한 전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허건의 그림 한 점은 갖고 싶어 했다. 허건은 동양화의 열풍을 이끌며 전라도 지역을 동양화로 가득 채웠다. 전라도 지역에 가면 다방이나 식당에 가도 그림 몇 점은 걸려 있다는 동양화의 전설도 다 허건의 그림 인기와 관련이 있다.

신체의 불우를 극복한 의지와 좋은 품성으로 이름난 허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허건은 자신을 찾는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작고 간단한 그림 한 점이라도 들려 보냈다. 세상에 허건의 그림이 많아져 작품을 남발했다는 오해도 받지만, 그의 미술에 대한 아름다운 정이기도 했다. 남농 허건의 작품 인기는 현대에도 여전하다. 동양화의 열기가 식어가는 중에도 허건의 작품은 여전히 찾는 이가 많고, 남농이란 호는 동양화를 상징하는 말로 미술계를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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