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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수학의 점과 물리의 점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감성물리’ 저자

  •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  |   입력 : 2023-12-04 19:30:11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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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초등 산수 시간. 선생님은 ‘폐곡선’을 설명하신 후 칠판에 그려진 다양한 도형들의 닫힘 여부를 물으셨다. 교실 안 꼬맹이들은 처음 출발한 분필 끝이 최종적으로 멈추는 지점에 온 신경을 집중했고, 호명된 대여섯 명의 학생들은 전부 정답을 말했다. 간혹 장난기가 발동한 선생님이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틈을 지닌 선을 그리셨지만, 의도를 눈치챈 아이들은 모두 ‘개곡선’이라 답했다. 덕분에 학급 학생 대부분이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선생님은 다음 문제를 위해 칠판을 채웠던 도형들을 지우셨다. 문득 칠판에서 떨어지는 하얀 가루가 마치 선을 구성하던 점들이 해체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허공 속을 떠다니는 하얀 분진에 정신을 빼앗겨 있던 순간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판 위에는 찌그러진 타원이 그려져 있었다. 앞서 배운 방식대로라면 ‘폐곡선’이 정답이겠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분필 가루로 가득 차 있었다. 급기야 칠판에 그려진 하얀 선이 점차 확대되면서 폭을 지닌 커다란 도로가 되었다. 카메라 배율이 확대되듯 도로 위를 가득 채운 하얀 조약돌이 보였고, 어느새 나는 조약돌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개미가 되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분필 가루들의 틈을 찾다 보면 칠판 위에 그려진 하얀 선을 관통하는 길이 존재할 것 같았다. 나는 ‘개곡선’이라 답했고 수업을 듣던 친구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고대 그리스 수학이 집결된 유클리드의 ‘원론’에서 0차원의 ‘점’은 부분이 없는 존재로 정의된다. 따라서 1차원의 ‘선’은 폭이 없고 ‘선’의 양쪽 끝에는 크기가 없는 점이 있다. 유사한 방식으로 2차원의 ‘면’은 크기를 지니지만 두께가 없으며 면의 끝은 폭이 없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학적 유한 크기의 연속체는 크기 없는 요소의 무한 합인 셈이다. 이렇게 크기 없이 위치 정보만을 알려주는 수학적 ‘점’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일상 언어에선 얼굴 위의 ‘점’, 점묘화의 ‘점’, 마침표 ‘점’처럼 크기를 지닌 물리적 ‘점’과 혼용된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크기를 지니는 실재 세상의 ‘점’으로부터 크기 없는 ‘점’이 작동하는 이상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포장될 수도 있겠지만 추상 세계에 가치 우위를 부여하는 태도는 물리적 ‘점’의 크기를 간과하게 만들 수도 있다.

2023년 노벨 화학상이 수여된 ‘양자점’ 역시 ‘점’과 ‘0차원’이라는 수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수 나노미터 크기의 양자점 속은 실제 수만 개의 원자 구슬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양자점 속 전자의 입장에선 모든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제한된 구속의 공간이다. 이를테면 캡슐호텔의 좁은 공간은 인간의 몸동작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인간적 관점에서 캡슐호텔 방은 0차원이고, 좁은 복도는 1차원, 천정이 낮은 아파트는 평수가 넓어도 2차원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파동성을 지닌 전자에게 양자점은 특정 파장만 허락되는 구속의 공간이다. ‘양자선(1차원)’과 ‘양자면(2차원)’도 수학적 정의와 다르게 각각 폭과 두께를 지니고 있으며 나노미터 크기의 구속 정도에 따라 차원이 구분된다. 물리의 차원은 수학의 차원과 다르다.

고대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역시 나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점’을 닮았다. 하지만 크기를 지닌 원자를 통해 인류는 물질 속의 모습이 수학적 연속체가 아닌 분절적이라는 사실과 함께 원자보다 더 작은 세상도 알게 되었다. 반면, 현대 기하학은 부분을 지니는 점이나 점 자체가 없는 추상적 공간을 설정하기도 한다. 다원주의적 신화나 종교처럼 수학은 다양한 세계관을 제공하지만, 때론 편견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똑같은 물리 세상도 수학적 교리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물리학자는 수학적 다신교 신자나 무신론자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전지적 시점의 이상적 세계를 맹신하기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실 경험과 인간적 한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문학과 미술처럼, 물리학은 르네상스적이어야 한다. 물리학도 관념적 이상과 실재적 현실의 차이를 자각하며 혁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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