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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젖은 낙엽

  • 강춘진 기자 choonjin@kookje.co.kr
  •  |   입력 : 2023-12-24 19:27:38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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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세상을 고운 빛깔로 물들이며 떨어지는 낙엽은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낭만과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찬란한 봄꽃을 청춘에 빗대 인생 후반기로 접어드는 세대를 비유하기도 한다.

즉석에서 묻고 즉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강연 프로그램 ‘즉문즉설’로 유명했던 법륜 스님은 2013년 펴낸 ‘인생수업-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휴 출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이 들면 드는 대로, 늙으면 늙는 대로, 주름살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담담히 자신을 받아들여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다.” 그러면서 낙엽은 떨어질 때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잘 물들어서 예쁜 단풍이 되기도 하고, 쭈그러져서 가랑잎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나 더 붙이자면 젖은 낙엽이 떠오른다.

젖은 낙엽은 땅에 착 달라붙어 빗자루로 잘 쓸어지지 않아 치우기도 힘들다. 국어사전에는 ‘구두나 몸에 붙으면 쉽게 떼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퇴직 후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집안 일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빗댄 말로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쓸모는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정년 퇴직 후의 남편을 젖은 낙엽을 뜻하는 ‘누레오치바’란 말이 유행했다. 어떤 주부가 “일에만 몰두하던 남편이 퇴직 후 집에서 젖은 낙엽처럼 방해물만 되는 존재가 됐다”고 한 발언을 평론가가 소개하면서 널리 퍼졌다고 한다. 아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따라오고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남편을 표현하는 말로 정착되고, 1989년에는 일본 사회의 유행어 대상을 받을 정도였다. 쓰레기보다는 나은 느낌이지만 치워버리고 싶어도 쉽게 치워지지 않는 존재를 의미하는 셈이다. 경제 활동을 못하는 남성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시기를 맞아 정년 퇴직자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와 맞물려 젖은 낙엽이라는 말이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분위기다. 보통 30년 이상 회사와 가족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한 그들은 갑자기 바뀐 처량한 신세가 서러울 법하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70세 이상에도 일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지난날에 연연하지 않고 늘 배우고 건강하다면 인생 후반기도 풍요롭다. 누구나 곱게 늙고 당당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겠다. 젖은 낙엽이라는 말의 유행을 막는 길이다.

강춘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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