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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지리산 문화권의 새로운 구상

이병주 박경리 조정래 소설, 시대 초월한 재미·교훈 선사

향토성·문화창달 관점 연구…능동적으로 독자층 만나야

김종회 문학평론가·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 김종회 문학평론가·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  |   입력 : 2024-02-14 19:23:28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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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의 옛 이름은 ‘국제신보’다.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이 언론사에서 소설가 나림 이병주는 편집국장 겸 주필을 지냈다. 당시에 그가 쓴 사설이나 기사는 명문장으로 소문이 났으며 대학의 신문방송학과에서 교범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필화 사건으로 복역한 다음 출소하여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소설의 지역적 배경은, 자신의 향리인 경남 하동과 진주를 거쳐 부산으로 확대되고 다시 서울과 동아시아·미주·유럽으로 확산된다.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한국 근·현대 역사를 다룬 3부작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는 모두 지리산이라는 지역적 기반에 걸쳐져 있다.

소설적 이야기의 재미에 있어, 이병주 문학은 탁월한 장점이 있다. 초기 작품 ‘소설·알렉산드리아’부터 ‘마술사’ ‘예낭 풍물지’ ‘쥘부채’ 등의 단편에서는 새롭고 강력한 주제와 더불어 독자에게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 체험을 선사했다. 그리고 뒤이어 발표된 ‘지리산’ ‘바람과 구름과 비’ ‘행복어사전’ 같은 장편도 그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현대 사회에 있어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많은 장편 역시 그 미학적 가치에 대해 일부 부정적 평가가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재미’에 있어서는 탁월한 강점을 갖고 있었다.

이병주 소설이 보이는 동서고금의 문헌 섭렵과 시대 및 역사에 대한 견식, 세상살이의 이치와 인간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성찰 등은, 그의 작품이 언제 어디서나 현장의 직접적인 문제와 교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한다. 오늘날의 재치와 순발력을 앞세운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면모다. 그의 소설을 통해 삶의 지혜와 경륜을 배울 수 있다는 교훈은 매우 소중하다. 이 대목은 지금 연령이나 지위에 있어 우리 사회의 상층부가 된 그 당대의 독자들과 이병주 소설을 연계하면서,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독서운동이나 문화산업적 관심을 환기하는 주요한 동인이 된다.

이병주 소설의 역사성은 그의 대표적인 역사소설들이 증명하듯 매우 극적인 요소들, 그리고 방대한 규모에 의해 부양되고 있다. 동시에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독특한 해석적 관점이 등장인물을 통해 발화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이 작가 자신의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유사한 체험을 가진 독자와의 친화력을 발굴하는 데 유익하다. 더욱이 자신의 체험을 반영하는, 지역적 연고를 가진 소설들의 사례는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다.

경남 일원의 지역성을 배경으로 시작하는 또 하나의 대작은 박경리의 ‘토지’다. 한 시대 본격문학의 역작이 분명한 이 작품은, 그 많은 이야기의 분량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대중친화력을 촉발했다. ‘토지’ 또한 시종일관 이야기의 재미를 유지한다. 이 부분에 강세가 없다면 누구도 그처럼 많은 부피의 독서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구체적 세부에 있어서 장대한 규모의 서사적 집적을 자랑하는 한편, 각기 단락의 이야기들이 그것대로 독립된 서사 체계를 지니면서 지류에서 본류로 나아간다.

‘토지’의 이야기성은 시대 배경에 있어 1970년대 소설의 흥왕기, 창작 경향에 있어 대하장편의 집단 출현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러한 경향과 이야기의 재미가 조화롭게 만남으로써 하나의 문학사적 획을 그을 수 있었다. ‘토지’의 주제는 ‘인간의 존엄과 소외문제, 그리고 낭만적 사랑에서 생명 사상으로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부각하면서 시대를 넘어 오늘의 독자에게 육박하는 현실감각을 보여준다. 이처럼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일반화가 가능한 주제들은, ‘토지’를 전 시대나 앞선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동시대 현실 속에서 만나는 담론의 집적으로 읽게 한다.

이병주의 ‘지리산’과 박경리의 ‘토지’에서 조금 더 눈을 넓혀 보면, 지리산 저 건너편 보성 벌교에서 시작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은 이 삼자를 지리산 문화권으로 묶어 함께 연구해 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미상불 이병주기념사업회는 그러한 취지로 여러 차례 영호남 학술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다. 올해 계획하는 이병주 다큐멘터리 제작도 그 후속에 있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이와 같은 방향성을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한다.

문학은 과거 한 시대의 지도적 교과서로 기능하던 시기처럼, 먼지를 둘러쓴 책장 안에서 수요자의 손길을 기다리던 의고적 자세로서는 이제 설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길과 산울 가로 나가 능동적으로 독자 대중을 만나야 한다. 문학은 더 이상 저택의 안채를 점령한 ‘주인’이 아니며, 그 주변을 지나가는 ‘길손’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설득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에 지역적 특성과 지역문학 창달에 관한 적극적 인식이 필요하다. 이병주 박경리 조정래를 연계하는, 지리산 문화권의 새로운 연대를 제안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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