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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수의 그림산책] 무호 이한복의 ‘운룡도’

황정수 미술평론가

  • 황정수 미술평론가
  •  |   입력 : 2024-02-25 18:51:08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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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용(龍)’의 해다. 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지만, 용만큼 인간과 가까운 동물도 없다.

이한복의 ‘운룡도’ 개인소장.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소풍 때만 되면 설레는 마음을 달랠 수 없어 밤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렸다. 내일은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빌지만 어떤 해에는 야속하게도 기대를 저버리고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속상한 마음을 안고 학교에 가면 꼭 나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천둥과 번개에 놀란 경비 아저씨가 삽으로 찍어 죽이는 바람에 학교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학교에만 있었던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전국 어느 학교에나 있는 민족이 공유한 전설이었다.

이렇듯 용은 뱀이나 미꾸라지 같은 하찮은 미물이 이무기를 거쳐 하늘에 오르는 귀한 존재였다. 이런 상승적 속성이 용을 우리 풍속에서 좋은 희망을 가져다주는 ‘길상(吉祥)’적인 존재로 받들게 되었다. 때로는 왕과 같은 무한한 권력을 가진 존재를 수호하기도 하고, 등용문과 같이 높은 관직에 오르는 영광을 의미하기도 했다.

용은 미술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쓰였다. 전설처럼 하늘에 오르는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하늘을 나는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권력자 층에서 볼 때는 권력을 지켜주는 존재였고, 일반 평민의 가슴엔 희망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신앙의 존재였다. 조선시대 화가 안견(安堅)과 석경(石敬)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용 그림이 유명하고, 민화에도 용의 모습은 자주 등장한다.

근대기 용 그림으로는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4)의 ‘운룡도’가 눈에 띈다. 이한복은 근대 서화가 중에서 특이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일찍부터 조석진과 안중식이 운영하던 경성서화미술원에서 김은호 이상범 등과 함께 서화를 배웠지만, 그의 미술 세계를 지배한 것은 1919년 동양화가로는 처음으로 도쿄미술학교에 유학을 하며 배운 새로운 경향의 미술이었다. 그는 진명여학교에서 교사를 하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새로운 화풍을 구현하려는 현실의 생각과 달리, 그가 정신적으로 추구한 것은 결국 가장 조선적인 그림이었다. 조선시대 서화골동을 수집하며 조선의 정신을 찾으려 했고, 추사 김정희 등이 이룩한 뛰어난 조선 미술에서 동양적 정신을 찾으려 했다.

이한복의 ‘운룡도’는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인 석경의 용 그림을 차용해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석경의 그림은 바다의 거센 파도를 이기고 구름 위로 올라 여의주를 발에 끼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다.

이한복은 석경의 틀에 박힌 구성에서 용의 모습만을 끄집어 내 회화적으로 생생한 화면을 만들어내었다. 질긴 고급 조선 장지에 오로지 먹 하나만을 사용해 그렸다. 진하고 연한 먹의 자유로운 농담 구사가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의 동세에 생동감을 준다. 우뚝 솟은 뿔과 긴 수염, 움칫거리는 몸통의 동세 표현은 이한복이 매우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였음을 증명한다. 휑한 듯한 큰 눈에 어리숙해 보이는 얼굴은 상상의 위력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의 소망을 들어주는 친근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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