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지인의 전화가 왔다. 가족이 장 폐색으로 대학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는데 입원실이 없고 부산에 고령의 중증환자를 받아줄 곳이 없어 창원 소재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권유받았다. 혹시 우리 병원에서 치료가 가능한지 문의했다. 직장 상부의 대장이 암으로 막혔고 복부 팽만이 있었다. 긴급하게 스텐트 시술을 하고 10일 정도 기다렸다가 환자의 상태가 안정되자 암 수술을 하고 환자는 무사히 퇴원했다. 이후 환자와 가족은 평온을 찾았다.
중증 환자를 받는 2차 병원이 사라졌다. 25년 전 필자와 같이 근무하던 선배 신경외과 의사는 사흘이 멀다 하고 뇌출혈 환자를 수술하다 이어지는 의료분쟁에 번 아웃이 왔다. 밤새 수술해서 또 환자 한명 살렸다고 자랑하던 그는 대체의학을 하겠다며 메스를 던지고 암 환자 치료 요양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필수의료 붕괴가 시작된 지 오래다. 의료계는 오랫동안 필수의료의 현장을 떠나는 의사가 늘고, 힘들고 보상이 적은 영역으로 진입하는 젊은 의사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절박하게 호소했으나 국가는 이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의사에 대한 여론만 악화됐다.
의사에 대한 규제와 압박의 범위는 넓어지고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법이 일례다. 진료 과정에서 생긴 환자의 피해를 국가가 중재하겠다는 취지의 법률이 편향 작동해서 필수의료 활동을 위축시킨 경향이 있다. 모든 범죄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의사면허가 박탈되는 법안으로 의사는 성직자 수준의 생활이 요구된다.
장 폐색 환자에서 보존치료를 하다 수술 지연으로, 환자 사망 상황의 판단 과정에 개입되어, 영상을 잘 못 봐서 환자의 병변을 놓친 등의 행위가 의료과실로 판결되어 동료 의사가 법정 구속되는 것을 넋 놓고 지켜봐야 했다. 의료 행위의 실수가 용서되지 않았고, 진료 과정의 변수도 감안되지 않았다. 실손보험에 구멍 난 보험회사는 의사를 탓하며 소송을 남발했다.
의료전달체계 붕괴와 지역의료 퇴화를 재기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트린 포퓰리즘 정책으로 ‘문케어(문재인 정부의 의료정책)’를 지적한다. 빅 5 병원의 문턱을 낮췄고 지방 환자들의 수도권 행렬이 급증했다. 물밀 듯 몰려드는 지방 환자의 편의를 위해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병원도 생겼다. 급기야 하루 환자 1만 명에 연 2조 원 매출을 올리는 공룡병원을 탄생시켰다.
1977년 시작된 국민건강보험 정책 당시 70% 원가에 책정된 수술 수가는 물가와 의료현장의 인건비 상승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눈감고 인정해 줬던 특진비, 상급 병실비, 검사비, 비급여 등에 대해 칼질이 시작됐다. 대신 제공했던 복부 초음파, MRI 급여 인정 등 유화정책은 정권이 바뀌자 철회됐다.
의대 열풍은 활활 타 올랐다. 최상위 성적의 학생들이 몇 해의 실패를 감수하고 의대를 지원했다. 늦은 나이에 이공계에서 전공을 바꾼 이도 허다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리스크가 높고 보상이 적은 필수의료는 몰락했고, 피안성(피부 안과 성형)과 정재영(정형 재활 영상)은 인기가 치솟았다.
의업이 의료서비스로 형해화됐다. 의사들의 탈 필수의료 행진은 심화됐고 의사 숫자가 이슈가 됐다. 정부는 OECD 대비 부족한 의사 통계를 들며 의대 증원을 해야 무너진 필수의료와 지역 불균형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의사는 OECD 대비 낮은 수가에 리스크 감수하며 사명감으로 버티는데 근원적 대책 없이 집단이기주의로 모는 정부를 원망하는 입장이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며, 의술에 대해 연구하고, 후배 양성에 전념하는 전문가다. 의사는 환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 헌신 사명감 성취감 자부심 등의 훈훈한 단어를 가슴에 품고 산다. 오늘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가 안갯속에 있고 필수의료는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다. 이 사회의 선(善)한 영향력과 자정 능력으로 우리 의업이 정화되고 정상화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