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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과학기술 홀대의 슬픈 자화상

남승훈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 명예회장

  • 남승훈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 명예회장
  •  |   입력 : 2024-02-26 19:03:0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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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R&D 예산 삭감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2월 16일 카이스트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축사 중 삭감된 R&D 예산을 복원해 달라고 외치던 졸업생의 입이 막히고 사지가 들린 채 행사장 밖으로 퇴장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번 일로 과학기술인들이 염원하는 R&D 예산 복원에 대한 막무가내식 정부의 대응에 공분하고 있다.

R&D 예산 삭감이 발표된 지난해부터 과학기술계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삭감 원인과 예산 삭감으로 인해 초래되는 과학계의 쇠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정부는 일명 ‘입틀막’으로 대응해 연구자들을 설득할 기회마저 잃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과학에 대한 중요성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해 왔다. 실질적인 지원 정도만 다를 뿐, 국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과학을 지목하며 과학기술 정책에 R&D의 중요성을 녹여내었다. IMF 외환 위기와 금융위기 때도 지켜왔던 R&D 예산을 33년 만에 대폭 삭감시킨 것이다.

R&D 예산은 단지 1년간 몇몇 연구기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 국가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번 삭감으로 이공계 기피 현상 심화, 후속세대 양성 차질, 우수연구인력 이탈, 과학기술 생태계 악화, 과학기술 성장 저해 등을 가져와 결국 국가 경쟁력이 약화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정부는 일부 사업의 예산을 90%까지 삭감한 경우도 있고, 일정 부분 삭감에도 불구하고 당초 목표치를 완수하라는 불합리한 주문도 있었다. 이런 사례는 정부가 R&D 분야를 얼마나 가볍게 보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모호한 기준으로 단행된 일괄적 예산 삭감과 R&D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없이 진행되는 정책이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과학기술 분야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은 천연자원 없이 인재 교육과 과학기술 투자를 통해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도 기초과학을 지원해야 한다.” 20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조지 스무트 홍콩과학기술대 교수는 지난해 9월 한국에서 열린 ‘노벨 프라이즈 다이얼로그 2023’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노벨 수상자들은 한국의 R&D 삭감에 대해 “지속적이고 꾸준한 투자 없이는 과학과 산업 발전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래핀 발견으로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과학은 4, 5년 만에 즉각적인 결과물을 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예산 삭감으로 한국 연구계는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한국 R&D 분야를 걱정했다.

예산 삭감으로 인한 과학계의 혼돈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부 시기인 2008 회계연도의 과학예산 삭감으로 입자가속기연구소 인력 중 10%가량이 해고될 위험에 처하는 등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노벨 수상자 20명은 부시 대통령에게 ‘긴급 기초과학 지원’을 촉구하는 서명을 보냈고, 이후 부시 행정부는 3억3800만 달러에 이르는 과학 분야 추가 예산을 편성한 사례가 있다.

현재 세계는 기술 분야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등 국가가 나서 ‘기술 패권 경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과학기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기에 세계 정세와 역행하는 정책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윤석열 정부는 신년사에서도 국정과제에서도 R&D 투자를 늘리겠다고 약속했고, 대통령 취임식 때도 자유 과학 세계를 취임사 키워드로 삼았다. 지난 1월 5일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 인사회’를 찾아 “과학기술은 국가의 미래이며 성장의 핵심”이라며 임기 중 R&D 예산 대폭 확대를 약속했다. 이번 카이스트 졸업식 축사에서도 R&D 예산의 확대를 말했다. 정부는 말로만 과학의 중요성을 말하지 말고 R&D 예산 회복과 설득력 있는 과학기술 정책을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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