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그리스 드라마의 부활을 위해 스스로를 ‘카메라타’라고 칭하는 예술가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새로운 형태의 ‘음악으로 된 극’인오페라를 탄생시켰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를 최초로 오페라는 본격적으로 작곡되면서 이탈리아에서 전유럽으로 퍼져 나간다. 17세기 말 베네치아에만 17개의 오페라극장이 있었다고 하니 가히 그 열풍이 짐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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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쟈코모 푸치니(1858~1924). |
이렇게 바로크를 주도했던 이탈리아는 고전시대에 와서 모차르트에게, 그리고 이후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등에 잠시 주도권을 넘긴 적이 있지만 오페라의 주된 역사를 이탈리아가 주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로시니로부터 도니제티, 벨리니, 베르디, 푸치니로 이어지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계보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바로 그 낭만 오페라의 마지막 계보인 푸치니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다. 푸치니 오페라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그의 대본은 대부분 삶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인 사랑 증오 배신 죽음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전개는 단순하고 문제적 인물의 성격도 쉽게 공감이 간다. 한마디로 푸치니 오페라는 잘 만들어진 통속극이다. 모든 예술은 고결한 이상과 영혼의 정화를 추구하지만 한편 이런 통속적인 감정들과 그 교감의 효과를 부인할 수 없다. 푸치니는 그 누구보다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알았고 그것을 끄집어내는데 최고의 솜씨를 발휘했다. 실제 푸치니는 “나는 들새, 오페라 대본, 매력적인 여성을 쫓는 대사냥꾼이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사냥을 좋아했고 자동차광, 애연가로 하고 싶은 취미는 다 누리면서 멋진 콧수염과 잘생긴 외모까지 한마디로 한량 같은 작곡가였다.
그러나 푸치니는 수많은 평론가나 작곡가로부터 날선 비판을 받았다. 하나만 예를 들면 평론가 토렌프란카는 “푸치니는 퇴폐주의자! 그의 오페라는 수십 년 내로 잊혀질 것이다”고 극언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오페라는 그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더욱 인기가 올라갔다. 사실 푸치니는 독창적인 작곡가다. 그는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다른 작곡가, 악파 등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유행했던 베리스모 오페라도 따르지 않았고 인상파나 신고전주의, 미래주의, 12음 음악 등 당대의 새로운 음악의 영향도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다 넘보는 절충주의도 아니었다. 푸치니는 천재형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만의 노래를 하는 강한 개성의 독창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는 또 늘 대본을 깊이있게 연구했으며 새로운 소재를 계속 찾으며 이국적인 내용의 일련의 작품들을 썼다. ‘나비부인’을 작곡할 때는 일본 영사관을 찾으면서 일본에 대한 연구를 했고, ‘서부의 아가씨’에서는 미국을, ‘투란토트’에서는 중국을 그 소재로 했다.
1924년 11월 29일 푸치니가 사망하던 날 당시 로마에서는 ‘라보엠’이 공연되고 있었는데 사망소식을 듣고 바로 오케스트라는 공연을 중단하고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1926년 제자 알파노가 완성한 미완의 오페라 ‘투란토트’가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될 때 토스카니니는 3막 ‘류의 죽음’까지 지휘하고 지휘봉을 내려 놓으며 “여기까지가 대가가 작곡한 부분입니다”고 말하고 무대를 내려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22년 푸치니는 “최근의 음악은 선율이 사라졌다. 나는 이것이 오페라의 종언이라고 믿는다”며 새로운 음악에 대한 우려를 글로 남긴 적이 있다. 푸치니의 예측은 얼추 맞은 것 같다. 푸치니를 끝으로 벨칸토 오페라는 종언을 고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삶에 오페라가 함께 하는 한 푸치니의 오페라는 늘 우리 곁에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