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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시인의 어머니

김이듬 시인

  • 김이듬 시인
  •  |   입력 : 2024-05-21 18:35:35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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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근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 출간 기념 북토크 행사가 합정역 근처에서 열린 날이었다. 비교적 젊은 독자들이 대다수였다. 행사 중반부쯤 나는 마이크에 대고 객석에 계신 분 중에서 누군가 시를 낭독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앞줄에 앉아 계시던 아름다운 분이 손을 들고 자신이 읽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누구보다 진지하고 다정한 눈빛을 반짝이며 경청하고 계셔서 눈에 띄었던 분인데, 시집을 펼친 채 차분하게 일어나 ‘내일 쓸 시’를 낭독해 주셨다. 다소 떨리는 고혹적인 목소리로.

사인회가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분이 다가오셨다. 처음 뵙는 분인데 아는 분 같았다. “제 딸이 이 행사에 몹시 오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피치 못할 일이 생겨 제가 대신 왔답니다. 딸에게 전해주려고 시인님이 하시는 말씀을 모두 메모했어요. 저의 딸이 좋아하는 시인님을 저도 뵙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나는 그분이 건네는 선물까지 받으며 어안이 벙벙했다. 따님의 이름을 여쭤보니 김연덕이라고 하셨다. “아, 제가 사랑하는 시인의 어머니셨군요.”

시인의 어머니라고 해서 모두 시를 애송하는 건 아니다. 모든 어머니가 자식이 전념하는 일이나 취향을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을 처음 접했던 중학생 시절, 나는 분노하고 절망했다. 나의 어머니에게서 신성성은커녕 잔혹한 학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가족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희생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어머니와 비교할수록 나는 신마저 내팽개친 아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모성 이데올로기가 어머니에게 과중한 의무를 덧씌우고 자식에게 기대심리를 조장한다는 것을 나는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나는 가방을 싸고 있습니다/엄마를 버려야/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엄마는 그늘이었습니다/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어둠이었습니다/어디선가 파 냄새 마늘 냄새가 났습니다//엄마가 항상 네 곁에 있으니/나아가라! 딸아!//우리가 함께 불행을 나누면/어둠 속의 귓속말처럼 단맛이 퍼지니/어서 와서 가족처럼 낡은 불행을 핥고 내 원한을 빌려 가라!/어서 와, 나의 두 번째 인생!”(김행숙, ‘나의 길’ 부분)

시적 화자인 딸은 엄마의 두 번째 인생이기를 거부한다. 엄마를 버려야 자신의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언제나 곁에 있기를 바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라면 위험한 관계가 아닐까. 사랑하고 있는 이를 향한 애착보다는 배려와 성장, 자유가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와 나의 새어머니에게 엄마로서의 태도를 바랐고 엄마로서의 의무를 기대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왜 그랬을까. 우리는 서로를 개별적 인간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사회가 학습시킨 모녀지간의 사랑을 요구했던 것 같다. 모성이나 효심이라는 단어에 포섭되지 않을 때 우리는 서로를 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새어머니한테 반항하다가 저녁도 못 먹고 친구 집에 가면 친구의 엄마는 내가 배고픈 걸 어떻게 아시고 배불리 먹여주셨다. 내 콧물을 닦아주셨다. 특히 40년 지기 영희 지미 영미의 엄마. 그래서인지 얼마 전 영희 엄마의 장례식장에 가서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주변 사람들이 내 팔을 부축했다. 내겐 엄마가 부족했던 게 아니라 어머니가 넘치게 많았던 것이다.

방금까지 귀가 약간 먼 할머니와 부추전에 청주를 마셨다. 영덕읍 해안 절벽 마을에 홀로 사시는 102세 이분순 할머니. 올봄에 이 마을에 내 작업실이 생겨서 들락거리다가 할머니를 이따금 뵙게 되었다. 며칠 전엔 어버이날이라서 분홍색 카네이션 화분을 드렸는데, 오늘 보니 그 꽃을 화단에 옮겨 심어놓으셨다. 우리는 낡은 평상에 앉아 바다나 보며 별 얘기 안 했다. 나는 할머니께 큰소리로 여쭈었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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