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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융합의 안목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감성물리’ 저자

  •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  |   입력 : 2024-06-03 19:33:34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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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개인전은 그림일기 같다. 입구에서부터 동선을 따라 전시된 각각의 그림 속에는 작가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 작은 핸드폰 화면에 QR코드가 인식되면서부터 연결되는 창처럼 그림 하나가 눈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어떤 그림은 세상을 깨우는 새벽 사찰의 웅장한 범종 소리로 들리고, 어떤 그림에선 새들이 재잘거리는 듯한 피아노 선율이 들린다. 다음 그림을 만나기 전 마주하는 전시실 벽은 긴장 가득한 침묵의 쉼표 같다. 그러므로 벽을 따라 전시된 그림들은 악보처럼도 읽힌다. 악보를 통해 전달되는 음악적 서사처럼 그림들을 순서대로 감상하다 보면 언어로 풀어내지 못한 마음의 산과 파도가 느껴진다. 미술관 그림들도 동선을 따라 진동운동을 한다.

전시실 동선을 따라가며 시간적 주기성을 느낄 수 있지만 관람을 마친 후 전시 공간 가운데 앉아 그림들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으면 벽과 벽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패턴을 얻을 수 있다. 물리학은 공간적으로 드러나는 파동의 규칙적 간격을 ‘파장’이라 부른다. 사실, 미술관에 진열된 그림들은 시간순이 아닐 수 있다. 큐레이터나 작가의 해석에 따라 작품의 순서는 재배치된다. 역사도 그렇다. 역사는 사건의 그림을 단순히 시간순으로 벽에 거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 축과 공간 축으로 구성된 시공간의 평면 위에 수많은 사건을 펼쳐놓은 뒤 새로운 풍경을 직조하는 작업이다.

시간의 주기성은 기억에 의존한다. 즉, 과거의 장면들을 배열하는 역사의 반추를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시간적 전후를 공간적 앞뒤의 이미지로 표상화한다. 미술관 동선과 악보 모두 1차원적 공간 축이 시간 축의 기능을 하고 있다. 시간의 축은 공간의 축과 정말 구분되는 존재일까? 차라리 x축과 y축으로 만들어진 수학적 평면처럼 ‘시간’과 ‘공간’의 두 축으로 ‘시공간’ 평면을 만들면 어떨까? 분리된 시간과 공간의 실이 아니라 ‘시공간’이라는 직조된 면을 통해 역사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파리에서 역사를 전공하던 한 문과생은 우연히 특수상대성이론이 묘사하는 놀라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는 관측자의 경우, 달리는 속력의 크기에 따라 다른 풍경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정지한 관측자에게는 공간적으로 떨어진 두 장소에서 동시에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관측자에겐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별개의 두 사건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관측자의 빠른 상대속력에 따라 ‘시공간’ 평면 위 사건들이 새롭게 조합될 수 있다면 원자처럼 작은 세상 속 전자는 시간적 주기성이 공간적 파장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을까?” 이 도발적 상상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물리학을 학부 과정부터 새롭게 시작했고 20년 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물질파’ 이론을 만든 그의 이름은 루이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은 양자 파동을 확률적으로 해석하는 현 물리학계의 해석과 다르게 특수상대성이론에 모티브를 두고 있었지만, 입자의 운동을 파동적으로 해석하는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획일적 틀에서 벗어나 ‘시공간’이라는 혼합적 영역에서 상대적 관점으로 사건의 풍경을 재구성한다는 핵심 아이디어의 대담성은 역사 전공 중에 익힌 인문학적 통찰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많은 대학이 분야 간 경계를 허문 다양한 무전공 융합 과정을 준비하고 있지만 대부분 뷔페 음식처럼 선택 과목의 분야만 넓힌 방식에 머물고 있다. AI가 전문 지식인마저 위협하는 격변의 시대에는 지식의 단순 습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특정 이론의 뼈대가 되는 사유 구조와 핵심 모티브를 간파해 다른 관점과 비교하거나 융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틀에 박힌 암기보다 열린 토론과 협력적 창작 활동이 요구되며 생각의 재료에는 인문 예술 과학 기술의 경계도 없어야 한다. 다양한 색 맛 향을 지닌 재료에서 명품 요리 레시피를 찾아내는 셰프의 감각처럼 지식 융합에도 안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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