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아침숲길] 더불어 나누는 사람

이정엽 국립부산국악원장

  • 이정엽 국립부산국악원장
  •  |   입력 : 2024-06-18 19:21:54
  •  |   본지 18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담장 너머로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쫑긋 세우니 ‘놀~자!’ 하고 동네 친구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반나절 동안 등짝으로 마룻바닥에 광을 내고 있던 터라 신발을 구겨 신다가 냅다 집어 들고는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그리 불려 나가 골목부터 뒷동산까지 휘젓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노을이 드리운 지붕 틈 사이로 올라오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마른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허기를 자극한다. 해 질 녘까지 지겹도록 어울려 놀았는데도 헤어짐이 아쉬워 내일 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다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지금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궁금한 코흘리개 시절의 동네 친구들이 무척이나 그립다.

놀이에 집중하던 나이를 지나 사춘기가 한창일 무렵.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처음으로 친구에게 털어놓고,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비밀 이야기를 공유하고 지켜내는 경험이야 어느 정도 있어 왔지만,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조차 힘든 일을 친구의 공감과 위로를 통해 절반씩 나눠 가졌던 그날은 청춘 일기의 첫 장이 되었다. 당시에도 나이에 비해 한참 성숙해 있던 그 친구는 이십 대 청년이 되었을 때 내게,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그러한 친구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 친구가 지금은 옆에 없다. 평생지기로 더불어 나누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는 그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지 못했나 보다.

어떤 작가가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물었다. 복수의 답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꼽은 것들의 종류가 응답자의 수와 비슷했다는 것이 흥미롭지만, 역시 응답자 대다수가 친구를 가족 사랑 꿈 행복 등과 함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으로 꼽았다. 앞서 열거한 소중한 것들에 집중하는 시기나 시점의 차이가 있을 뿐 나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친구를 정의할 때 더불어 나누기를 원하고 즐기며 서로에게 긍정적이고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관계를 말한다. 또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사상 등에 대한 공감대가 클수록 친구의 관계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소중한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기에 이제는 새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에 더 노력하고, 일반적인 친구보다 좋은 친구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힘쓴다. 좋은 친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마음속에 새겨 둔 세 단어가 있다. 믿음 공경 책선(責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존경 또는 공경할 수 있는 사람, 바른 일을 하도록 권하는 사람이 된다면 요즘 말로 ‘베프’나 ‘찐친’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단오를 앞두고 믿음과 공경 그리고 책선의 대상으로 삼은 소리 명창께서 귀한 선물을 보내주셨다. 설, 추석과 함께 3대 명절 중 하나인 단오는 한 해 중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고 더운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와 닿아 있어 예로부터 부채를 선물했다고 한다. 보내주신 부채에는 직접 붓글씨로 쓴 “창밖에 국화를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노니 /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이 돋네”라는 멋진 시조가 담겨 있었다. ‘해동가요’에 실린 시조로, 마지막 장은 “아희야 거문고 청 쳐라 밤새도록 놀아 보리라” 이며, 시조 전체가 남도 잡가 ‘흥타령’의 노랫말로도 쓰인다.

명창께서는 근래 산자락이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안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집 앞 시냇물 소리가 청량한 너른 마당이 있는 집에서 큰 창문을 내어놓고,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와 더불어 국화와 달빛의 정취를 나누고 음악과 술로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시조에 담겨 있는 것 같아 새삼 감동스러웠다. 그 마음에 화답하고자 지그시 눈을 감고 보내주신 부채로 부채질을 하니, 그 뜻이 청량한 부채 바람에 오롯이 실려 온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해운대 벗어나 우리동네로…부산이 온통 극장이네요
  2. 2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3. 3“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4. 4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5. 5‘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6. 6[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7. 7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8. 8“가덕 공사비 증액 법 개정 앞서 정부 약속부터”(종합)
  9. 9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10. 10시민이 만든 '부캉이' 공공 자산으로…부산시, 상표권 독점 막는다
  1. 1‘교정시설 조성 지원 특별법’ 발의…부산구치소·교도소 통합 뒷받침
  2. 2[속보] “전두환 내란 아냐” 김태규 ‘제명 촉구 결의안’의결
  3. 3부산 국힘 “보좌진 유죄 선고…전재수 시장, 시민에 사과해야”
  4. 4[속보]우크라 외무 “한국 중요해…외교적 오해 해결바라”
  5. 5국힘, 중수청 앞서 “범죄자 천국될 것” 여론전(종합)
  6. 6李대통령 “우크라, 상대국 원수 거짓말쟁이 만들어…사과 거부시 추가 조치”
  7. 7李 “김지용, 친윤 아닌 반윤 검사” 중수청장 청문 요청키로
  8. 8靑 “이 대통령 ‘불의의 사고’ 표현, 부상 장병 위로한 것…북한 면죄부 주려는 것 아냐”
  9. 9이 대통령, 김지용 중수청장 후보자 청문요청안 재가
  10. 10정동영 “DMZ 지뢰 사고, 불행한 일…평화공존 더 절실해져”
  1. 1“가덕 공사비 증액 법 개정 앞서 정부 약속부터”(종합)
  2. 2동래 플래그십 문 연 ‘르노’…미래차 R&D센터 내년 오픈
  3. 3북극 누빈 아라온호, 항로예측 기틀 마련
  4. 4신한은행 해킹 서버서 “‘중국어 AI 침투도구’ 흔적 발견”
  5. 5신한銀 2만5000명 고객정보 털렸다…당국 조사
  6. 6대선주조 부산 문화 앞장…‘부산국제록페스티벌’ 8년째 후원 행보
  7. 7최태원, 9440억 규모 SK 지분 매각 결정…노소영 재산분할액과 같은 규모
  8. 8리사이클링·항만운영·담수화…부산 미래산업 이끌 혁신기술
  9. 9BPA, 5번째 해외 물류거점 구축…베트남 사업 본궤도
  10. 10삼성중공업, 올해 LNG운반선 20척 수주. 글로벌 경쟁력 입증
  1. 1부산에 하나 뿐인데…‘부산예대’ 내년 2월 문 닫는다
  2. 2“능인선원 매각 협상 나서라” 국제신문 사활 건 총력투쟁
  3. 3준비 덜 된 경찰시대…‘대국민 수사 실험’ 우려
  4. 4‘반쪽’ 자갈치 축제…내홍에 창립멤버 어패류조합 빠졌다
  5. 5전재수 ‘되돌릴 수 없는 해양수도 기반 조성’ 선언
  6. 6부산중수청 문 여는데 아직 공사중…외부 출입통제도 어려워
  7. 7시민이 만든 '부캉이' 공공 자산으로…부산시, 상표권 독점 막는다
  8. 8아침기온 경남 7도, 부산 15도…2일부터 쌀쌀해진다
  9. 9“기관장 인선, 유능하면 지역 불문…산은 유치 채널 총동원”
  10. 10[속보] 북항 상어 ‘부캉이’ 2차 구조작전 진행 중…수로에 그물 설치
  1. 1송교창·최준용 빠진 KCC…‘루이스 킹’ 희망될까
  2. 2KLPGA 대회 처음 부산서 여는 HJ重… “지역과 상생할 것”
  3. 3메치고 쏘고…한국 유도·양궁 ‘금빛 데이’
  4. 4한국 여자 양궁 단체전 인도에 져 은메달…8연패 무산
  5. 5성적 부진·단장 공백·감독 결별·구단주 경고…김해FC ‘사중고’
  6. 6자존심 지켰다…남자 양궁 리커브 단체전서 금메달
  7. 7LoL 대표팀, 대만 꺾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무실 세트 제패
  8. 8HJ중공업, 8∼11일 KLPGA 챔피언십 대회 주최…부산서 처음 열려
  9. 9돌아온 금빛 주역들, 프로야구 막판 순위·타이틀 경쟁
  10. 10해볼 만하다…女축구, 8년 만의 AG 메달 도전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인공지능 정렬’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
자동화의 세상에서 지능화의 세계로
국제칼럼 [전체보기]
개헌 말하려면 헌법 준수부터
나림 이병주, 더 일찍 법(法)으로 통(通)했다
기고 [전체보기]
전문대학을 소개합니다
상어가 떠난 뒤, 북항에 남겨야 할 것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영산회상, 불교음악에서 풍류음악으로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히말라야의 경고
도청도설 [전체보기]
민원인(들)
AI 패권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공동선(Common Good)’으로서 간병 복지
직업병에 대한 자세, 무지와 고의 사이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지독한 집념이 세운 로컬 자산, 대한도기
사설 [전체보기]
생곡소각장 정치적 셈법보다 원칙대로 추진해야
알래스카 LNG, 협력하되 국익이 최우선이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청년기본법, 청년친화도시
인공지능(AI)과 인류 멸종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아트부산, 숫자 이후의 질문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행위별수가제와 인두제, 오해와 진실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 곡전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무(武)
의료 전문성이 병원 밖 나가는 길 열어야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