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필자가 회원으로 있는 한국독일사학회는 ‘이스라엘과 독일의 동료 지식인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오욕과 고통의 역사를 지닌 한국인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생명은 모두 소중하며 폭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금 당장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과 봉쇄를 멈추고 대화에 나서도록 당신들의 정부를 설득하라! 특히 나치 독일의 죄상을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섰던 독일 역사가들이여.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의 절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진정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흔히 독일은 과거청산의 모범국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 대한 책임을 방기해온 일본 정부와 달리 독일 정부와 사회는 통렬한 반성과 사죄에 임해왔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필자를 포함해 국내의 독일사 연구자들은 그간 학술지나 각종 매체를 통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부각하고 가해국 독일의 책임지는 자세를 칭송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관점을 좀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독일에 대한 세간의, 특히 우리 학계의 긍정적 이미지는 이미 다양한 방향에서 도전받고 있다. 호주 출신의 역사가 더크 모시스가 2021년에 발표한 논쟁적 에세이 ‘독일의 교리문답’은 독일 지식사회가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판에 경도되어 다른 논리를 배제하는 정치종교, 즉 일종의 ‘교리문답’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하며 스스로를 도덕적 청정지대로 끌어올린 독일 역사가들을 ‘성직자’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는데, 이들 ‘성직자’들은 당연히 이 ‘좌파’의 논리에 노발대발했다.

모시스의 도발은 ‘제2의 역사가 논쟁’으로 일컬어진다. 1980년대의 독일 지식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논쟁’은 극우파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가 나치의 폭력을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독일인의 투쟁으로, 유대인 강제수용소도 소련식 수용소에 대한 맞대응으로 해석한 것에 대해 진보적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문제 삼고 나서서 나치의 범죄는 다른 어떤 범죄와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악이라고 주장하면서 좌우의 진영대결로 번졌다. 당시 민주화된 서독에서 승자는 진보 진영이었고, 나치 범죄에 대한 호도 및 유대인 혐오를 조장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용납지 않는 풍토가 굳어졌다. 당시 서독 사회의 선택은 정의로웠으나 수십 년이 지나서도 똑같은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고통은 과연 유대인들이 겪은 ‘절대적’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소한 것일까? 현재의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은 뿌리 깊은 유대인 혐오의 발로일까? 독일인들은 과거나 현재나 한결같이 유대인들을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는 듯하다. 예전에는 특별히 나쁘게, 지금은 특별히 좋게.

독일인들의 이러한 편집증은 카메룬 출신의 역사가이자 정치이론가인 아쉴 음벰베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이 아프리카 지식인은 2020년 봄 독일의 한 예술축제의 기조연설자로 초청받았는데, 독일의 몇몇 정치인들이 그의 경력과 발언을 문제 삼으며 초청 취소를 요구했다. 그들의 지적에 따르면, 음벰베는 팔레스타인 주도의 비폭력 운동인 BDS, 즉 친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보이콧, 투자철회, 제재’ 운동을 지지하는 등 노골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쟁이 있기 바로 전 해에 독일 연방의회는 BDS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축제는 당시의 팬데믹 상황으로 전면 취소되었지만 불붙은 논란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음벰베는 그의 학술연구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 정책, 일명 ‘아파르트헤이트’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박해와 비교했다. 독일 비판가들은 이러한 시각을 반유대주의라고 몰아세웠으나 곧 전 세계의 400명 넘는 지식인들이 음벰베를 옹호하고 나섰으며 심지어 일부 유대인 지식인들은 독일 메르켈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한 이스라엘 비판을 반유대주의와 혼동시키는 독일 정치인들에게 제재를 가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와중에 좀 더 본질적인 이슈가 불거져 나왔다. 음벰베의 조국인 카메룬은 서구 제국주의가 활개 치던 시절 독일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에 속해 있었다. 독일 지배자들은 아프리카에서 몇몇 부족을 말살하는 등 희대의 만행을 자행했었다.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자행한 만행에 대해서는 깊이 사죄하는 와중에도 아프리카의 옛 식민지 피해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민주국가 서독은 인종차별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지지했었다. 그렇다면 음벰베에 대한 지나친 음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대인에 대한 지나친 방어심리는 자신들의 또 다른 죄악을 덮기 위함이었나?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더 지독한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어느덧 독일이 과거청산 모범국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