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적 관점에서 해운산업은 좀 특이하다. 한 척에 수백억에서 수천억에 이르는 엄청난 선가(船價) 때문이다. 건조 비용은 금융에서 우선 차입하고 건조 후에 선박 운용을 통해 채무도 상환하고 수익도 창출하는 방식이다. 선주 즉, 해운업계로부터 건조 비용을 정산받아야 하는 조선소 관점에서 본다면 금융계 상황은 경영에 매우 지대한 영향 인자다. 2008년부터 시작된 리먼브라더스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2011년 사상 최초로 수출액 500억 달러를 넘기며 금융위기 속에서의 역설적 기록을 세웠다.
2000년대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심해유전 채굴 산업은 갈수록 덩치를 키워갔으며 그 직접적 혜택은 조선산업이 받았기 때문이다. 유전이 개발되면 원유와 함께 천연가스도 채굴된다. 해양에서의 유전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채굴과 동시에 채굴한 천연가스를 액화시켜 저장할 수 있는 부유식 해양구조물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세계 최고의 조선 기술을 보유한 우리나라로서는 한 척에 2조 원이 넘는 이들 선박이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고, 매장된 원유가 고갈되지 않는 한 영원할 것 같은 황금알이라 믿었다.
원유와 가스의 채굴 수요와 맞물려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는 LNG운반선을 필두로 코리아 독주가 시작되었다. 액화천연가스를 운송하기 위해서는 영하 163도를 다루는 전용 화물창이 필수적이다. 해당 기술에 대한 설계와 제작 특허는 프랑스기업 G사가 보유하고 있었고 글로벌 해운선사들은 특별한 반대 없이 묵시적으로 그 설계를 표준으로 채택하는 분위기였다. G사가 우리나라 조선소에서 벌어들인 기술료 수익만도 연간 수천억대에 이르렀다. LNG운반선 시장이 성장 일로를 달릴 때 G사가 1조 원대 가격에 매물로 나왔다. 하지만 수년간 이어진 호황으로 역대급 ‘실탄’을 보유한 우리나라 조선사들 입장에서는 급하게 인수할 이유가 없는 매물이었다. 영업만 좀 더 열심히 해도 산더미 같은 현금성 수입을 당장 손에 쥘 수 있는데, 기술료 지불 부담이 영업능력 강화보다 후순위로 다루어졌을 법도 하다.
G사와 우리나라 조선소가 맺은 TALA(Technical Assistance and License Agreement)라는 기술협정이 있다. G사의 특허를 사용하려면 라이선스 계약과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함께 구매해야 하며, 두 협정 내용은 분리할 수 없고 관련 비용도 함께 지불하라는 내용이다. 엔지니어링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현장 기술 경험이 송두리째 G사로 넘어가는 족쇄였다.이런 G사가 2016년 상하이에 사무실을 개소했다. 사실상 중국 기업이 된 것이다. G사의 TALA는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우리나라 LNG운반선 건조기술이 고스란히 중국에 넘어가는 불씨가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과거 중국산 LNG운반선의 품질을 의심하던 글로벌 해운시장의 판도는 급격히 바뀌었고, 2022년 중국은 전 세계 LNG운반선 발주량의 30% 이상을 수주했다. 그리고 2023년 조선산업 가치사슬 종합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주었다. 공교롭게도 이 해에 중국 국영 조선그룹인 중국선박공업집단(China State Shipbuilding Corporation Limited, CSSC)과 G사와의 공식 기술협력 계약이 대대적으로 공표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2000년대 조선산업 호황기와 침체기를 거치면서 중국에 LNG운반선 시장을 내준 역사적 기록이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 ‘K-조선 슈퍼사이클’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금융위기가 직접적인 원인이었겠지만, 자금력이 부족했던 중소형 조선소들은 과거 조선산업 침체기 동안 줄도산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기나긴 암흑기를 버텨온 조선산업계는 내심 오늘의 호황을 즐기는 듯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조선산업 침체기 그 이전의 호황도, 지금의 슈퍼사이클도 LNG운반선 즉 에너지 시장 덕분이다. 에너지 시장은 시대가 원하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운송하는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주도해 왔다. 우리나라가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LNG운반선 건조기술을 모두 가져 버린 G사의 경험과 데이터베이스가 지금의 중국 조선산업을 엄청난 속도로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일련의 상황과 중국의 성장세를 걱정하며 중국 속담을 떠올려 본다. 후랑추전랑 (後浪推前浪). ‘앞의 물결은 뒤의 물결에 밀려나기 마련’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다음으로 조선산업 1위 국가의 패권을 노리는 중국의 속내가 이렇지 않을까. 후발주자로서의 위치는 인정하면서도 선두주자를 따라잡기 위한 전략만큼은 무섭도록 꼼꼼하게 운영하는 듯싶다. 조선산업 초호황을 만들어낸 상징적 제품에 대해서, G사를 통한 ‘합법적’ 기술 유출을 알면서도 막지 못해 탄식만 했던 우리나라 조선산업계가 K-조선 슈퍼사이클을 맞아 어떤 전략을 그려낼지 궁금해진다. 세계 금융시장은 다시 굳건해졌고, 에너지 시장은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마지못해 뒤따라오는 물결에 떠밀려 갈 것이 아니라 앞서서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