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광주를 다녀왔다. 광주비엔날레 현장을 보려던 것이었지만, 내심 무등산 산행이 구미를 더 당겼다. 3시간여 ‘짧은’ 산행 이후 만난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차분하면서도 정감이 넘치는, 생기가 도는 곳이다. 근대 서양인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호랑가시나무 언덕, 이름이 참 정겹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옛 유수만 선교사 사택)와 허철선 선교사 사택, 호랑가시나무창작소(원요한 선교사 사택),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등으로 ‘남아’ 있다. 그곳 건물 중 양림미술관,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이강하미술관 등은 1일까지 광주비엔날레의 전시시설로 쓰였다. 마을의 옛 건물은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지붕이 낮다. 이런 골목길은 부산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부산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개발의 그늘과 관련 있다. 부산 도심에 있던 근대의 건물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성냥갑 같은 볼품 없는 ‘빌딩’이 들어섰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억의 자산’이 자리할 공간은 없다. 그래도 애써 찾아보자면 굳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첫째로 부산 강서구 대저1동 일대의 근대 문화유산 길을 꼽고 싶다. 기자와 대저1동 근대 가옥들과의 첫 만남은 지난 2019년 5월이었다. ‘부산을 보행친화 도시로’를 연재할 때였다. 그때의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선명하다. ‘대저수리공사기념비’로 시작하는 길이었다. 전형적인 일본식 중층 지붕과 목조 가옥, 물결 같은 일자형 기와, 다다미방에서 정원을 내다보도록 한 둥근 달 모양의 ‘월창(月窓)’, 창문 밖에 두꺼운 널빤지를 덧댄 ‘눈썹 창’과 비늘 모양의 널빤지 벽, 그리고 집 마당에 보이는 ‘배(梨) 창고’들…. 곳곳에서 100년 전의 시계가 멈춰선 것 같은 모습을 보았다. 대저지역은 1905년 무렵부터 밀려들어온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대저1동의 일본식 가옥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이주농촌의 흔적이다. 2010년 조사 당시만 해도 대저1동에 46채의 일본식 가옥이 있었다. 여기에는 일제의 토지 침탈과 식민지 조선 농민의 소작농 전락, 고리대 횡포와 이중소작료 강요 등 지역성과 역사성이 오롯하게 담겼다. 그런데 문화재가 아니라고, 도시재생을 하겠다고 수년 전 ‘100년 역사’를 허문 적도 있다. 이제 그곳의 일본식 가옥과 건물은 몇 안 된다. 한국 근대사의 한 단면이라 할 이 공간의 풍경이 앞으로 계속 유지될지 알 수 없다.
다음은 기장옛길이다. 현재 복원·연구조사 작업이 한창인 기장읍성이 시종착지다. 기장옛길에는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 ‘조선의 맛 칼럼니스트’로 불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효전(孝田)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자취가 배어 있다. 심노숭은 총 1965일(5년 5개월)에 이르는 기장의 유배 기간 매일 일기를 썼다. 이를 묶어 펴낸 것이 ‘남천일록(南遷日錄)’이다. 서울 이방인의 시각으로 기장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을 글로 담았다. ‘남천일록’에는 심노숭이 기장으로 유배를 가던 길과 유배에서 벗어나 서울로 복귀할 때의 길도 묘사돼 있다. 심노숭은 유배에서 풀려날 때 기장읍성 남문에서 용소골(용소웰빙공원), 신명역(도시철도 4호선 안평역 자리)을 지나 동래읍성으로 간 뒤 범어사 양산 밀양 선산 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었다. 용소웰빙공원 위쪽에는 200m 구간의 기장옛길(용소옛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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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 터를 가늠할 뿐이지만, 스토리 여행의 보물창고와 같은 길이 또 있다. 동구와 중구의 초량왜관 길이 그것이다. 초량왜관은 조선 후기 해항도시 부산에 200년간 있었던 조선과 일본 간 외교·무역의 공간이었다. 조선 안에서 유일한 일본인 거주공간이었다. 외국인 거주공간으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컸다. 지금은 관수가(초량왜관 우두머리가 머물던 곳)를 오르는 계단과 초량왜관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만 전한다. 초량왜관에 있었던 건물들을 더듬어 찾아보자. 조선 군인이 오가는 사람을 감시하고 짐 수색까지 했던 설문(設門)은 도시철도 1호선 부산역 1번 출구 옆 상해문 쪽에 있었다. 초량객사(일본 사신들이 조선 국왕의 전패에 예를 올리던 곳) 자리는 봉래초등학교에, 연향대청(일본 사신들에 연향을 베풀던 곳)은 광일초등학교에 각각 자리 잡았다. 왜관 안에 있던 서대청은 우리저축은행, 중대청은 대각사, 동대청은 부산은행 신창동 지점, 개시대청(조선과 일본 상인들의 교역 장소)과 수문(守門)은 동광동 삼거리 부근, 재판가(조선과 일본 간 외교 업무나 교섭을 주관하던 곳)는 타워힐호텔 자리에 각각 있었다고 한다. 초량왜관은 글로벌 도시 부산의 원류 격이다. 일찍이 국제 물류·교역의 도시였음을 증명하는 곳이 바로 초량왜관이다. 그래서 초량왜관의 핵심 건물이던 관수가가 사라진 것은 두고 두고 아쉽다. 관수가는 일본영사관으로, 부산이사청, 부산부청으로 계속 사용되면서 오랜 기간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오광수 편집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