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진영 인사 1000여 명을 무차별 수사해 200여 명을 구속하고 5명이 자살하게 만들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얼마 전까지 한동훈 국민의힘 전 대표를 비난하며 쏟아냈던 말이다. 한 전 대표가 검사 시절 진보 정권의 보수 탄압에 앞장선 과거를 부각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홍 시장이 이 말을 처음 꺼낸 건 지난 대선 때 국민의힘 당내 경선 국면이었고,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의 경쟁자 윤석열 후보였다. 박근혜 정부 때 항명으로 좌천됐다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발탁된 후 보수 정권에서 벌어진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국정농단’ ‘양승태 사법농단’ 등을 수사하며 소위 ‘적폐 청산’의 칼을 휘두른 전력 때문이다.
그런 윤석열이 보수쪽 대선 후보가 되자 부산 울산 경남(PK) 유권자는 아무 연고나 인연이 없는 그를 평균 이상으로 지지했다. 배우자 김건희 여사 문제로 실망감이 극대화한 가운데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을 궤멸 직전에서 구한 건 부산의 17석이었다. 당정 불화로 여당의 패색이 짙어지는 듯했던 금정구청장 보궐선거에서도 국민의힘 후보에게 60% 이상 표를 몰아줬다. 이런 일련의 선거 결과는 윤석열이나 한동훈 혹은 국민의힘을 선호해서일 수 있겠으나, 그 어느 쪽도 아닌 그저 보수 진영 자체의 전략적 인내일 수도 있다. PK가 없었다면 윤 대통령은 훨씬 더 빨리 탄핵 시험대에 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느닷없는 ‘12·3 비상계엄’ 선포는 그런 PK마저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고 있다. 1979년 10월 18일 새벽 0시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울려 퍼졌다. 부마항쟁 사흘째이자 ‘10·26’ ‘12·12’ ‘5·18’로 이어지는 사태의 출발점이다. 남포동 옛 부산시청 청사 앞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늘어섰고 주요 관광서는 총을 든 군인들이 막아섰다. 학생들은 등굣길 교문 앞에서 선생님 대신 무장한 군인을 맞닥뜨렸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가정에서 자중자애하라’는 포고문을 읽고 전율해야 했다. 부마항쟁 시위로 붙잡힌 사람은 PK에서 1600명에 가깝다. 비상계엄 사태 직후 윤석열 정부 국정 지지율(리얼미터 기준)이 전국 어느 도시보다 PK에서 많이 떨어진 건 45년 전 트라우마가 되살아났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을 정점으로 뭉친 야권은 감사원장 방송통신위원장 등 윤석열 정부 관료와 국무위원에 대한 22건의 탄핵소추를 발의했다. 대장동 백현동 사건을 수사한 검사 탄핵을 추진하고, 의석수를 무기로 행정부 예산편성권까지 침해하는 입법 폭주를 저지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막겠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시대착오적 비상계엄의 파장은 훨씬 처참하다. 민주당은 비상계엄 선포에 동조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이유로 국무위원 3분의 1을 탄핵하겠다고 벼른다. 군통수권자의 명령을 따른 수뇌부 수사로 군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경찰청장과 서울청장이 동시에 구속되면서 치안 공백도 심각하다. 연금 의료 교육 노동 등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였던 4대 개혁은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그나마 인정받았던 대미 대일 외교는 불신의 늪에 빠졌다. 여론을 등지면서까지 윤 대통령이 지키고자 했던 아내조차 보호할 수 없게 됐다.
PK가 보수의 안방처럼 비치지만 그간의 투표 성향은 맹목적 지지와 거리가 멀다. 부산은 박근혜 정부 때 치러진 2016년 20대 총선에서 야당이던 민주당에 1990년 3당 합당 이후 가장 많은 5석을 안겨주며 민주당이 국회 다수당이 되는데 일조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방선거에서는 처음으로 민주당 출신 부산시장이 탄생했고, 기초단체장을 비롯해 광역·기초의회가 거의 대부분 민주당 우위라는 대변혁이 연출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고도 민심의 엄중함에 눈 감았던 보수정당에 회초리를 든 것이다. 그러다 21대와 22대 총선에선 오히려 독주하는 민주당에 견제심리가 작동했다. 무작정 특정 진영의 편에 서기보다는 권력의 오만과 폭주에 저항하고 응징하며 균형을 잡아왔던 게 PK 민심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세번째로 국회에서 탄핵됐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시간이다. 헌재 결정과 무관하게 윤 대통령은 ‘가장 어리석은 자해극을 벌인 통수권자’로 역사에 새겨질 것이다. 벚꽃 대선이든 장미 대선이든 또다시 선택의 순간을 마주할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 국민은 이미 8년 전 대통령 탄핵과 탄핵 이후 들어선 정부를 겪어본 경험이 있다. 그 경험에 대한 자성과 ‘순식간에 나라를 후진국으로 떨어뜨린’ 무도함에 대한 심판 사이에서 선택이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3시간짜리 계엄’으로 빚어진 탄핵 국면이 마냥 개운하지만은 않다. 차라리 대놓고 분노하기는 쉽다. 그러나 진보의 위선과 내로남불에 실망해 보수와의 악연을 애써 묻고 윤 대통령을 선택했던 PK의 배신감과 자괴감은 지워질 것 같지 않다.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