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세기적 한파가 몰아쳤다지만 이곳은 12월도 절반을 훌쩍 넘고서야 가로수들이 익었군요. 작업실 앞 키가 큰 은행나무는 온몸으로 한 해의 마지막을 칠하고 있습니다. 느리게 찾아온 발소리라 더 반갑고 고맙습니다. 샛노랗게 떨어진 잎을 주워들고 지나온 시간들을 가늠해봅니다. 마주앉아 노래인 듯 푸념인 듯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살면서 연한 햇살에도 반짝거리지만 허공에 기대 윙윙 울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방이 아득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기운 내’ 스쳐가는 바람결에도 힘이 솟아 벌떡 일어서기도 하면서요. 웬만큼 익숙해져 더 이상 허둥대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즈음 다시 아득하게 폭우를 맞기도 했겠지요. 그렇게 몸과 마음의 근육들이 단단해져 세상을 거뜬하게 품었을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아픔이 무엇일까요. 저의 경우 무조건 박수를 쳐주던 육친들이 하나 둘 사라질 때 죽음보다 더한 아픔으로 내 안에 갇혔습니다. 그때 ‘나와라. 같이 울자. 바깥은 지금 쏟아내기 좋은 계절이다. 속도 겉도 펼쳐 씻고 말리고 접고 다려보자. 홀로 섬이 되어 앓아서야 되겠나.’ 바닥에 붙어 울먹거리는 등을 쳐 깨워 준 세상만물이 고맙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언어로 삶의 통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상실된 사랑의 대상이 우리 가슴의 구멍을 막으러 올 때 우울해진다고 합니다. 그땐 지나가도록 길을 내 주라고 하네요. 잠시 보고 싶어 왔구나 생각하고 인사를 하라구요. 그냥 가볍게 “안녕!”이라 말하며 스쳐 지나가라는 겁니다. 애도가 상실에 대해 반복적으로 아파가며 치유하는 것이라면 과거형이 된 기억은 그리운 추억이 되기도 하겠지요.

나는 우물일까 우울일까/당신이 두레박을 던져 넣으면 언제든/시원한 물 철철 퍼 담아 마른 목 적셔대는,// 아니 나는 쥐구멍일까 슬픔일까/가장 빠르게 저쪽 어둠 속으로 넘어갈 수 있는/도피처/아무도 몰래 그리운 그림들 지워댈까// 아니아니, 나는 내가 뚫어댄 아픈 못 자국/벽마다 똑똑 쳐대던 웃음 자국 눈물 자국/내 모든 흔적들 걸어놓던 자리(권애숙 시, ‘QR코드, 구멍이야기’ 부분)

싸늘한 손이 싸늘한 손을 잡고 부빌 때 그렁하게 고이는 눈물이 아득한 거리를 지웁니다. 바람에 바닥이 쓸리는 듯, 날개가 퍼덕거리는 듯, 무겁고 가벼운 흐느낌이 조용히 어둠을 흔들어댑니다. 내가 누고? 한두 번 겪나? 큰소리를 쳐보지만 슬픔은 두 눈 축축하게 내리 감은 채 짙은 우울과 불안을 자주 흘립니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상실구멍이 닫힐까 염려를 하는 걸까요.

의지만으로 안 될 때 억지로 벗어나려 몸부림치다 더 큰 상처가 생깁니다. 자연스럽게 아파하고 슬퍼하며 지나가다 보면 어느새 과거형이 되고 미래는 든든해진 현재를 건네받아 편안해질 것입니다. 조금씩 흔들리며 가끔 넘어지기도 하며 지는 듯 견디는 듯 희미해져 가야지요. 엄동을 건너는 동안 너무 뻗대고 웅크리다 부러지거나 얼어붙어 재생불능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어디에서 온 빗방울입니까/나뭇잎 발코니/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주저앉아/울었던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만,/어쩌자고 아직도/마르지 않고 태양을 견딘답니까/스스로를 깨뜨릴 수 없는/물방울을 위해/당신께서는 손가락을 빌려주십시오/닿는 순간 한 채의/눈물누옥에 갇혀있던 날개가/폐허를 털고/날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한혜영 시 ‘부탁’ 시집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에서)

스스로를 깨지 못한 눈물누옥도 때가 되어 누가 톡 건드려만 줘도 갇혀있던 날개를 펴고 날아갑니다. 느닷없는 이별의 시간들과도 이젠 가볍고 편안하게 헤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엎드려 폐허의 시간을 보낸 만큼 창공의 시간을 즐길 수 있기를!

나 홀로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급히 떠나버린 당신들, 견딤의 한계점에 다다른 막내 이만 아픈 손을 흔들까 합니다. 안녕,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