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의 힘’을 다시 읽었다. 영국이 크림전쟁에 뛰어든 1854년 10월부터 1855년 1월까지 4개월 동안 영국 정부와 타임스(The Times)의 진실 게임을 풀어낸 책이다. ‘나의 언덕’이란 뜻을 담은 크림반도는 팽창하는 러시아 제국이나 이에 맞선 오스만 제국과 영국 프랑스 등 동맹국이나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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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지역대학신문기자연합 84동기회 회원들이 30일 국제신문 앞에서 국제신문 정상화를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
‘펜의 힘’은 타임스 편집장 존 딜레인(John Delane)과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군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위선과 무능의 영국 정부와 어떻게 싸웠는지 보여준다. 170년 전 크림반도에 투입된 영국군 2만1097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77%인 1만6323명은 전투와 상관없는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내각 총사퇴를 자초한 배경이다.
존 딜레인은 하워드 러셀을 크림반도에 파견했다. 최초의 종군기자 러셀은 무능력한 영국군 지휘부 실상을 현장에서 고발했고, 딜레인은 이를 지면에 가감없이 담아내며 정부 반성을 촉구하는 글을 이어갔다. 국가지상주의를 극복한 공론의 장 수호자 역할 뿐만 아니라 크림반도의 혹한과 부실하기 짝이 없는 야전병원에서 고통받는 군인들을 위한 범국민적 모금운동 구심점이 됐다.
나이팅게일 활약상은 익히 아는 바이다. 1856년 마지막 병사가 떠날 때까지 크림반도 야전병원을 지키다 귀국한 그는 간호사를 넘어 수학자이자 통계학자 면모를 보여준다. 크림전쟁 사상자 내역을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시각적으로 표현한 로즈 다이어그램(Rose Diagram)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 병원 운영 개선을 이끈다. 영국왕립통계학회 최초 여성 회원이 되고, 간호대학을 설립하는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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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신문 독자와의 만남 행사가 열린 지난 12일 부산 영화의전당 소극장에서 참석자들이 국제신문 응원 피켓을 펼쳐보이고 있다. 이원준 기자 windstorm@kookje.co.kr |
‘펜의 힘’을 곱씹은 까닭은 전호환 동명대학교 총장이 이 책을 소개하며 국제신문 존재 이유를 확인해줬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국제신문 독자와의 만남’ 행사장에서다. 그는 부산대 총장이던 2018년 이 책을 번역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올바른 글쓰기가 폭력이나 무력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지요.” 전 총장은 건전한 비판정신은 민주 사회의 기본이고, 국제신문은 부산을 비롯한 경남 울산 공론의 장으로 그 소명이 막중하다고 강조했다.
여러모로 현실과 겹친다. 3년째 이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냉혹한 국제 정세 그대로다. 다이내믹 하다 못해 ‘다이너마이트’한 대한민국은 더욱 그렇다. 어이없는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이후 시계제로 상황을 겪고 있다. 그는 국회에서 탄핵되고 헌법재판소의 파면 심판과 내란 수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사태를 낳으며 양극화한 정치적 토양이 뼈아프다. 준비 안 된 대통령이 편향된 유튜브에 찌들대로 찌들어 오판했을 가능성에 국민 분노가 더한다. 눈물과 피땀으로 쌓아올린 대한민국 위상을 뿌리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다지만 그 속내는 풍요 속 빈곤이다. 균형 잡힌 공론의 장 역할을 하기보다는 검증 없는 제 팔 제 흔들기가 횡행한다. 중앙 언론이 득세하다 보니 정작 부산 정서를 대변하는 정론지가 설 곳이 없어진다. 정보의 바다에서 정통 언론의 사막화라는 비정상이 일상화했다. 그 피해는 오롯이 부산 사람이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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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신문 임직원들이 지난 23일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국제신문 기업회생 신청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
물론 남탓만 할 수는 없다. 국제신문도 변화하는 언론 환경에 적응하고 시대 흐름을 주도해야 하지만 흡족한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통렬히 반성한다. 독자와의 만남은 국제신문 콘텐츠 다변화 노력과 독자 질책 및 격려의 접점이다. 국제신문이 제작해 칸영화제에 특별초청됐던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 상영이 하나다. 또 하나는 시민기자인 김석이 시조시인이 낭독한 응원 시조다. ‘국제신문 만세’ 초성을 딴 시조는 이렇다. ‘국민을 최고로 생각하는 국제신문/제각기 가는 길에 등대로 불 밝히며/신선한 아침을 떨쳐 하루의 문을 연다//문제해결 이상 없다 힘과 힘을 모으면/만 가지 걱정들도 꽃으로 피어난다/세파가 휘몰아쳐도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독자와 부산 울산 경남 주민을 믿는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는 지난 13일 부산문화회관 ‘2024부산시립예술단 연합공연, 창작칸타타 부산’에서 확인했다. 작품 말미에 사물놀이와 힙합 댄스가 어우러지는 장면이었다. 전통과 현대, 과거와 미래가 녹아들었다. 연희퍼포머그룹 처랏과 비보이그룹 킬라몽키즈가 소름돋는 하모니를 선사했다. 이 작품은 ‘마, 부산아이가’란 여섯 글자로 막을 내린다. 그곳에 국제신문이 있다.
창간 77년 국제신문은 대주주와 결별하고 건전한 공론의 장으로 거듭나려 지난 20일 기업회생 신청을 했다. 혹독한 겨울을 자성과 혁신으로 이겨내며 새로운 국제신문을 위한 홀로서기 시간으로 보내려 한다. 다시, 펜의 힘으로. 굽은 소나무가 고향 지킨다고 했다.
정상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