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2·3 계엄령을 선포한 뒤 대한민국은 여전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회가 지난달 14일 탄핵소추를 의결한 이후 윤 대통령은 즉시 직무가 정지됐다. 게다가 한덕수 전 권한대행 체제는 2주도 가지 못했다. 그가 국회에서 선출한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정계선·조한창·마은혁)의 임명을 사실상 거부하면서 즉각 탄핵당해서다. 최상목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체제에서도 국민의 혼돈과 불안감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잇단 탄핵으로 무너진 국정과 흐트러진 일상을 어떻게 바로잡을 건지, 정부나 정치권에서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달 29일에는 전남 무안국제공항에 착륙하던 태국 방콕발 제주항공 여객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공항 콘크리트 둔덕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179명이 사망하고 2명이 구조됐다. 1997년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사고로 229명이 희생된 이후 최악의 참사다. 참혹한 사고에 온 나라가 비통해하고 있다.
시국이 어수선해지면서 2025년 을사년(乙巳年)을 맞는 분위기도 뒤숭숭하다. 혹자는 “을사년에 우리나라에 어디 좋은 일 있었냐”며 암울해한다. 실제로 ‘을씨년스럽다’란 말은 ‘을사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하단 뜻이다. 1905년 11월 17일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며 외교권을 강제 박탈해 사실상 식민통치를 시작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온 나라가 치욕스러움과 침통함에 휩싸였기에 그 후 어수선한 날이면 ‘을사년스럽다’는 표현을 쓰게 됐고 이 말이 ‘을씨년스럽다’로 변형됐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을사년엔 흉흉한 일이 많았다. 1545년 조선 명종 즉위년에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이 충돌한 끝에 소윤이 승리하며 윤임 일파가 모조리 숙청된 을사사화가 있었다. 1965년 6월 22일엔 한일청구권협정이 이뤄졌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와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권을 포기하는 대신 5억 달러(보상금 3억, 차관 2억)를 제공받고 국교를 정상화한 일이다. 당시 협정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로 사회혼란이 극심했다. 개인의 배상 청구권 소멸을 놓고 현재도 여전히 논란이다.
올해 역시 탄핵정국이 이어져 정치적 격변을 겪었던 을사년의 불운이 반복될 수 있다며 불안해하는 이들이 많다.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든 기각하든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인용 땐 조기 대선 가시화로 여야 갈등이 심화하고 가뜩이나 쪼개진 민심의 양극화가 심화할 우려가 크다. 기각이 돼도 엄청난 사회적 후폭풍이 예고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탄핵 찬성 여론이 70%를 웃돈다. 이는 탄핵이 기각돼 윤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한다고 해도 국정 운영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사태로 이어지는 정국 불안은 증시 폭락과 원·달러 환율 상승 등 한국 경제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3분기까지만 해도 1300원대에 형성되던 원·달러 환율은 11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1400원을 돌파하더니 계엄령 사태로 1470원대까지 올랐다. 탄핵 판결 이후에도 원·달러 환율 상승 현상은 여전할 전망이다. 우리나라 산업경쟁력이 떨어지고 정치 불안과 고령화로 장기적 경제 침체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정부가 올해 경제성장률이 1.8%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을까 싶다. 이마저도 정치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을 전제한 수치다. 계엄사태 뒤 글로벌 투자은행(IB) 씨티와 JP모건은 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1.5%, 1.3%로 낮췄다. 지난해 서민의 삶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3고(高)’로 힘들었다. 새해에도 물가상승, 공공요금 인상, 가계부채 상환 부담 증가 등으로 서민의 일상생활은 더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고용시장은 물론 수출 전선도 위태롭다.
오는 20일 미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미국 우선주의 파고가 우리 경제에 입힐 타격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복합위기를 극복하려면 정부가 비상 국정 운영 체제를 가동해 경제·안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대행체제로선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국력을 결집해 국가적 고난을 극복하려면 정치권이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정부와 정치권, 국민이 일치단결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1~2023년 코로나19 사태 등을 이겨낸 저력이 있다. 국민의 응집력을 바탕으로 정치권이 협치를 발휘한다면 계엄과 탄핵사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 혼란과 좌절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다면 올해 ‘을사년’은 을씨년스럽지 않은 한 해가 될 수 있다.
이은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