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간 가족 중 암환자가 있거나, 응급의료를 요하는 사고를 당한 이가 있었다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 갔을 것이다. 지난해 2월 초 정부는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문제 등 필수의사 부족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가 속출하자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계획을 발표했다. 현 입학 정원 3058명에서 매년 2000명 씩(한 해 정원의 65%), 5년간 1만 명 확충을 목표로 했다(결과적으로 내년 정원에서 1509명(한 해 정원의 49%) 확대했다). 의사들은 단순 숫자 늘리기로 고질적인 의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대형병원에 근무하던 전공의 1만여 명이 집단 사직했고, 의대생들은 동맹 휴학하고 수업을 거부했다.
기자의 가족은 ‘운 좋게도’ 의정갈등 직전 암을 발견,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서 급하게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 후 본격화된 의정갈등으로 수차례 항암치료 과정에서 매번 일정이 늦춰질까 가슴 졸였고, 의료진의 피로 누적으로 대학병원에서조차 신규 환자를 받지 않는다는 보도가 나오면 ‘기존 환자’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근 부산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5명 중 3명이 잇따라 그만두면서 우리나라 암 발병 상위 순위인 위암 유방암 폐암 전립선암 등의 항암치료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혈액종양내과는 통상 암 수술이 끝난 환자의 다음 치료 단계를 맡아 각종 암종을 진단하고 항암제를 이용해 치료·관리하는 등 대부분 위중한 환자를 돌본다. 고통스런 항암치료 과정에서 의사의 얼굴 표정, 말 한마디가 환자와 그 가족에게 삶의 희망이 되거나 절망이 됐기에 그들의 부재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나라는 집 밖만 나서면 메디컬 빌딩이 즐비해 의사 과잉시대 같지만 절대 다수가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등에 쏠려 있다 보니 필수 의료 의사 부족을 통감한다. 국립중앙의료원의 ‘2022년 의료취약지 모니터링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250개 시·군·구 중 98곳(39.2%)이 응급의료 취약지이고, 108곳(43.2%)이 분만 의료 취약지로 분류됐다. 전국 기초지자체 10곳 중 4, 5곳은 주변에 분만이나 응급의료 처치를 받을 의료기관을 찾기 힘들다는 의미다. 지방에서는 연봉 3억, 4억 원을 준다고 해도 오겠다는 의사가 없다. OECD 통계(2023)를 봐도 인구 1000명 당 임상 의사가 한국은 2.6명으로 OECD 평균 3.7명에 못 미치고, 인구 10만 명당 의대 졸업자 수는 OECD 평균 14.0명(2020년 기준)의 절반인 7.2명으로 의사가 부족하다.
의료계는 정부와 정 반대 입장으로 맞선다. 정부는 고령화 사회 등으로 의사가 부족하다고 보지만 의료계는 배치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의사 부족은 ‘쏠림 현상’에서 비롯됐기에 의사 수 늘리기에 앞서 인력 재분배를 유도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수의료 분야의 수가 현실화,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보호 강화,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한 정책 등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 시도는 역대 어느 정부도 성공하지 못한 난제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는 정원을 줄여 의약분업을 가까스로 해냈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땐 의대 정원 400명 증원을 목표했지만 2주간의 의사 파업으로 맥없이 주저앉았다. 의대 정원 문제를 의사협회가 반대하는 나라도 없고, 의사협회의 허가를 받고 하는 나라도 없다고 하니, 매번 비슷한 상황에서 의료계의 막강한 권력을 실감하게 된다.
20년 이상 이런 과정을 지켜본 국민은 지난해 정부 발표 당시 의대 증원을 환영했고, 의료계를 설득하고 협상할 수 있는 최선·차선책들로 의료개혁이 성공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설익은 정책으로 지난 1년간 의정은 ‘강 대 강’으로 치달았다. 정부는 대화와 토론, 설득 대신 ‘너는 너, 나는 나’의 일방통행식 행보를 고집했고, 의료계는 일부 수가 인상과 법적 보호 조치 강화 등을 약속받았음에도 ‘의대 증원 불가’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협상 테이블로 나와 한해 2000명, 1509명 등 불가능한 숫자 대신 현실적인 인원을 제시한다든지, 정원 확대로 늘어난 의사가 지역·필수 의료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 제안 등을 바랐지만 신뢰가 깨진 상태에서는 어떤 해법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상태를 이어갈 것인가. 잘잘못을 따져 책임을 묻기엔 의료 공백으로 고통받는 국민의 신음이 너무 크다. 의료계에서는 더 큰 피해를 막으려면 전공의와 의대생이 돌아오게끔 명분과 동기를 줄 것을 요구한다. 다행히 새해 들어 정부가 내년도 의대정원 원점 재검토와 복귀하는 전공의에 대한 수련 및 입영 특례까지 제시하면서 의정대화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부와 의료계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에 놓고 의대 교육 정상화, 필수·지역 의료 공백 해결 등을 위한 현실적 방안을 마련, 하루빨리 지리멸렬한 의료 공백 사태를 끝내주길 바란다.
임은정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