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영화 ‘천년호’ 촬영 현장 취재차 중국 저장성 항저우를 간 적이 있다. 중국 1위안 지폐 뒷면에 그려진 호수 ‘서호’ 주변을 둘러보며 허름한 좌판에서 간식을 사 먹은 기억이 있다. 조용하고 아늑한 관광도시였다. 그런데 얼마 전 다시 찾은 항저우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수많은 고층건물과 최첨단 시설을 갖춘 현대적 도시로 바뀐 것이다. 알리바바를 비롯해 중국 신생 벤처기업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도시에 활력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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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챗GPT 대항마로 떠오른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 |
설 연휴부터 화제가 된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 본사가 항저우에 있다. 딥시크는 미국 오픈에이아이의 챗지피티(ChatGPT)보다 비용은 훨씬 적게 들이면서 성능은 비슷한 수준인 인공지능(AI) 모델 R1을 선보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AI 모델을 개발하려면 고성능 칩에 막대한 돈을 들여야 한다는 통념을 깼다.
깜짝 놀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를 만나 중국에 저사양칩까지 수출을 금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물론 딥시크를 둘러싼 의혹이 많다. 우선 저사양칩 사용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 AI모델 훈련 비용이 557만 달러(약 82억 원)에 불과했다는 점도 믿을 수 없다. 개인정보 유출 우려마저 크다. 이런 논란에도 중국의 AI 기술이 예상보다 경쟁력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한다. 중국은 배터리나 전기차 분야에서 가성비를 내세우며 빠르게 시장에 진출해 결국 성능을 끌어올렸다. AI 분야에서 중국은 같은 전략을 구사할 전망이다. 딥시크 같은 혁신적 기술을 가진 기업이 많다는 점은 우리로선 위협적이다.
딥시크 본사가 중국 수도 베이징이 아닌 항저우에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항저우는 베이징에서 1633㎞나 떨어진 도시다. 국토가 큰 중국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으나 대기업과 국가기관 대부분이 수도권에 집중된 우리나라와 확연히 다르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엔 금융, 항저우와 선전엔 최첨단 산업 등 국가 발전 전략을 수립해 도시 발전을 이끌고 있다. 반면 우리 정부는 국가균형발전을 꾀하려 여러 정책을 수립했으나 성과가 거의 없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9년 부산을 금융중심지로 지정한 것이다. 함께 선정된 서울에 비해 금융 인프라와 인력 기업 등이 부족해 글로벌 금융허브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산업은행 이전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항저우시가 중국 AI·로봇 산업 산실이 된 데는 시 경제 정책이 한몫했다. 항저우시는 2022년까지 AI 산업 발전과 혁신 응용 추진에 관한 90여 개 정책을 발표하고 실행했다고 한다. AI·로봇과 관련한 연구소가 많고 인근에 저장대와 저장과학기술대 등 명문 대학이 있어 인재 공급이 쉽다. 도시 강점이다. 딥시크 연구인력들은 대부분 해외 유학 경험 없이 중국 명문대를 졸업했거나 석·박사 과정에 있다. 딥시크 창립자인 량원펑은 저장대를 졸업했다. 저장대가 중국 5대 명문대학이나 우리로 치면 결국 지방대다. 텐센트 창업자인 마화텅도 광동성에 있는 선전대를 졸업하고 선전에 본사를 뒀다. 지역에서 자라고 대학을 졸업한 젊은 인재가 수도권으로 떠나고 명문대 출신 청년들이 서울 생활을 고집하는 것과 대비된다.
부산에는 4년제 대학이 15개 있다. 각 대학은 해양 금융 IT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고급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하지만 대학 졸업생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면서 부산은 ‘노인과 바다’의 도시라는 말을 듣고 있다. 젊은이들이 부산에 남으려면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돼야 한다. 대기업이 부산으로 이전하는 게 최선이지만 현실적으론 어렵다. 부산시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리노공업같은 강소기업을 육성하고 유치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실력과 잠재력을 갖춘 스타트업을 꾸준히 지원한다면 ‘부산판 딥시크’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 대만 TSMC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공장을 지난해 12월부터 가동하고 있다. 일본은 지진 위험국이다. 지진은 반도체 제작 공정상 큰 위험 요소지만 TSMC는 제2공장도 이곳에 세울 계획이다. 구마모토현이 항만과 공항 등 훌륭한 교통인프라를 갖췄고 구마모토대학과 인근 규슈대학 등에서 반도체 인재를 배출할 수 있어서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 역시 중요했다. 부산은 교통인프라, 인재육성 등 도시경쟁력 측면에서 구마모토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TSMC가 한국행을 고려했더라도 부산엔 오지 못했을 것 같다. 지역을 살리려는 일본과 달리 우리 정부는 서울이나 경기도 판교 등 수도권에 공장을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 수도권 사람들은 자본과 인프라가 집중되다 보면 지역은 물론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러다 다 죽는다”는 드라마 속 대사가 현실이 될지 모르겠다.
이은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