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은 어제의 인간이나 오늘의 인간이 지니는 특성이다. 오늘의 기술사회가 최첨단을 달리고 있을지라도, 이 기술사회가 어디로 가고 또 어디에서 마무리될지는 불확실하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에 바탕한다. 이 불확실성을 벗어나려고 어제의 인간이나 오늘의 인간은 이 불확실성을 거슬러 고정된 발판을 마련하고자 확실성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의 인간과 오늘의 인간이 확실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다르다. 어제의 인간이 가족을 바탕으로 한 집단 영역에서 확실성을 추구했다면, 오늘의 인간은 자아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영역에서 확실성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어제의 인간이나 오늘의 인간이 공통적으로 ‘주술’(呪術)을 통해 확실성을 추구하려는 것이 오늘날 뚜렷이 드러난다. 주술은 ‘초자연적 존재나 신비로운 힘을 빌려 여러 현상을 일으켜 인간의 길흉화복을 해결하려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자신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길흉화복이나 자신의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비하려고 초자연적 힘에 의지한다. 이를 확장하면 종교적 인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오래된 종교의 고유한 교리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주술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유럽 종교의 중심이 된 가톨릭 교회 또한 마찬가지다. 가톨릭 교회의 핵심 교리에도 불구하고, 대중 신심을 바탕으로 한 주술적인 행위와 감정들이 가톨릭 교회에도 있었다(예를 들어, 성직자나 수도자를 ‘신의 아들’로 떠받드는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 역사학의 발전과 깨어난 자아에 대한 강조로 유럽에서는 ‘탈(脫) 주술화’가 진행,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종교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으로 폄훼되었다. 따라서 신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이나 장소나 인물은 이성의 합리적 척도에 따라 다시 이해되었고, 민간 신심으로 내려오던 것들을 ‘미신’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탈주술화를 통해 합리적 이해가 유럽 사회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주술 현상에 대한 공론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도 인간 이성의 합리성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또 불확실한 사건의 전개와 결과를 미신과도 같은 주술보다는 인간이 감당하는 자유와 선택, 혹은 운명으로 대체했다(이처럼 이성으로 신앙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종교의 계시를 무시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us)으로 확장된다).
오늘날 우리 문명의 전개는 탈 주술화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모든 사회적 결정은 종교적 감정에 바탕하지 않고, 이성적 토론을 통한 합의에 도달한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은 종교가 주술의 활용이 아닌 이성의 올바른 활용을 이끌 것을 요구했다. 이로써 주술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주술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불확실한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결부된 이기적인 성공을 위해 불확실한 신들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주술이나 미신은 생활의 깊은 영역까지 파고 들었고(택일, 궁합, 오늘의 운세) 이성으로 밝혀낸 신학은 원초적인 다신론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흐름에서 신(神)은 인간을 위한 장치일 뿐이다(Deus ex machina).
그 결과, 이성적 토론의 통합 합의는 주술의 세계로 밀려나고, 그래서 인간의 자유와 선택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결정된다. 이는 인류가 오랜 세월을 거쳐 노력해 이룬 문명이 퇴보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곧 권력과 힘의 의지만이 남게 된다. 불확실한 인간이 불확실하게 신뢰하는 주술은 얼마나 불확실한가! 이러한 주술은 도박(아수라발발타)이나 극단적인 정치에서만 활용된다.
종교사에서 다신론은 단일신으로 통합되고, 주술은 보다 세련된 전례 형식을 지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은 신 앞에서, 또 신으로 말미암은 ‘실존’이 된다. 시대가 불확실하니 종교의 입지가 불확실하다고 여겨, 종교가 주술사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종교는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이 욕망을 버리라고 권고해야 한다. 종교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예민하게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