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지난 12·3비상계엄 소식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했다. 이뿐만 아니라, 1980년 신군부의 5·17비상계엄 이후 45년 만의 일이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더욱이 이번 계엄은 현직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점과 탄핵심판과 내란죄로 수사 받는 국내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다음은 대통령의 취임선서이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한글 해독만 가능하면 법에 대해 문외한조차도 이번 계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시민이 앞장서서 막아서고, 곡절 끝에 의원들이 신속하게 계엄해제를 의결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헌재의 심리과정과 계엄을 옹호하는 측에서 보여준 상식을 벗어난 태도(Attitude)는 후안무치 견강부회 적반하장으로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결국 시민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줬다.
그간 정치적 리더들의 어지간한 딴청에도 시민은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겨서 가려듣기도 하고 양해하기도 했다. 이제 시민의 인내심은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시민의 자정능력과 견제능력은 지난 대선과 지선(지방선거), 총선에서 잘 보여줬다.
즉, 제19대 대선으로 탄생된 ‘촛불정권’은 시민을 위한 정치가 부족해서 제20대 대선에서 0.73%의 차이로 정권을 넘겨주었다. 제8회 지방선거에서 특히 부산경남의 경우, 제7회와 완전히 여야가 뒤바뀐 ‘공수교대’로 나타났다. 제22대 총선에서는 5.48% 차이로 여당은 108석, 민주당은 175석을 차지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정치를 잘하지 못해 시민에게 신뢰와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상국가의 국정운영은 국헌과 적법절차를 준수하는 것이다. 이를 위반하면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져야한다. 얼핏 보면 여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야당도 권력을 분점, 견제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민은 여당의 독주가 예상될 때 의회가 견제할 수 있도록 ‘여소야대’로 만들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점에서 야당도 이번 사태가 발생하게 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점점 정치적 리더들의 소명의식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그러면 직업의식은 투철한가. 이들은 대개 정무직 또는 한시직 공무원이다. 직분에 충실하면서 적법절차에 따라 정치를 하지만, 때때로는 마치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 마냥 다투기도 한다. 게다가 조성된 난관을 정치로 풀지 못해 먹고 살기에도 바쁜 시민을 주기적으로 광장으로 불러낸다. 이럴 정도면 정치적 리더들도 사표를 쓰고 시민에게 호소하는 것이 맞다.
언제부터인가 거리에 나부끼고 있는 현수막을 들여다보면 미래비전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대부분이 그저 쪼개고 나누는 비방일색이라 마치 ‘스팸’같아 눈 둘 곳이 없다. 옛 말에 ‘싸우더라도 각방생활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지지고 볶든지, 격렬한 논쟁을 거치든지 어찌하든 정치로 해결하라는 것이 시민의 명령이다. 여당은 여당답게, 야당은 야당답게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며, 그 어떤 핑계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정치적 리더들이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못하고, 그들의 임무를 방기할 때 어김없이 심판 당한다. 여당은 이번 계엄에 ‘태도’를 분명하게 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새 출발을 해야 시민의 마음을 더 얻을 수 있다. 바로 직전 시민이 세웠다는 ‘촛불정권’조차도 정치를 잘하지 못하면 과감하게 내치는 것을 목도하지 않았는가. 질서 있는 퇴각과 집권당으로서 품격을 보이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런 국면에서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은 넌센스다. 보다 구체적인 미래비전을 제시해 그 어떤 정당보다 정치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럴 때라야만이 여·야당의 정치적 리더십이 이번의 위기를 극복하고 시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결자해지라 했다. 정치적 리더들이 위기를 자초한 만큼, 기왕 조성된 위기를 기회로 바꿔 이제는 정말 시민을 위해 정치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기라 했다. 이번 기회에 싹 다 고치자, 그것이 어렵다면 총체적으로 반성하고 가능하고 쉬우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올해는 을사늑약 120주년, 광복 80주년이다.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오늘을 만들어 온 저력을 떠올리면, 어제오늘의 사태는 비가 온 뒤에 더 단단해지듯이 정상국가로 가는 과정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