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오래된 이야기를 하자면, 영화 탄생 100주년이었던 1995년, 예술영화계의 정점으로 취급되는 그 어렵고 지루하다는 영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한국에서 개봉했고 서울에서만 1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전 세계에서 ‘희생’이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최초의 예라고 한다.
전설의 영화 잡지 ‘키노’,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주간 영화 전문지 ‘씨네21’이 창간된 해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영화광의 시대였다. 주요 대도시에는 비디오로 예술 영화를 상영하던 작은 시네마테크, 혹은 영화 동호회가 하나 혹은 그 이상씩 존재했다. 그렇게 ‘시네필’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1996년에는 첫 번째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때, 한국 영화가 수시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에서 제일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기생충’ 흥행을 끝으로 팬데믹이 찾아왔고, 그 결과 극장 산업은 위축됐으며 그 극복을 위해 관람료가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그러면서 한국 영화는 물론 모든 영화 시장이 경색됐다. 곳곳의 극장들이 문을 닫았고, 이 추세는 지속될 것 같다. 심지어 어느 극장에서는 ‘영화를 틀지 않고 리클라이너 시트에서 낮잠을 자는’ 행사까지 열릴 정도다. 멀지 않은 과거 한국의 극장은 가족, 혹은 연인 등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식당에서 돈을 내고 식사를 하며 시간을 맞춰 영화관에 들어가던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이쯤 되면 어떤 사람들은 영화의 멸망이라는 말을 조심스럽지 않게도 꺼낸다.
영화는 과연 사라질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형태로 살아남을 것인지 우리는 최근의 극장 흥행 추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신체 호러의 범주를 넘어서 여성 서사를 정면으로 주시하는 작품이다. 단순한 상업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현재 55만 명의 극장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1000만’이 흥행 영화의 어떤 기준이었던 이 나라에서 조금은 적은 숫자로 보이지만 대기업이 아닌 예술영화 전문 수입사가 들여온 작품으로는 놀라운 수치다. 지난해 화제가 된 파격적 형식의 홀로코스트물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이 회사의 수입 작품이었는데 10만 관객 돌파라는 유의미한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주 박스오피스 순위를 살펴보자면, 정확하게 대중적 상업영화라고 정의하긴 힘든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이 흥행 1위를 기록하며 200만 이상의 관객을 2주차에 동원했고, 2위는 교황 선출에 대한 회담 영화 ‘콘클라베’가 지키고 있다. 일련의 최근 흥행작들을 살펴보면, ‘그냥 깔끔하게 만들어지기만 한 영화’에 붙이는 멸칭이었던 ‘웰메이드 영화’가 아니라 강한 예술성이나 사회성을 가진 영화들이 많다. 극장에 영화광들이 모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니, 이제 영화광들만 극장에 남은 모양일 수도 있다.
사실 영화라는 매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한두 편의 영화가 전체 스크린을 차지해 거대한 흥행을 기록하는 것보다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하는 편이 훨씬 도움 된다. 또한 영화광들의 숫자는 전체 대중에 비해 적지만 그들의 실질 구매력은 강하다. ‘N차 관람’이라는 용어로 알 수 있는 반복 관람, 그리고 화제작에 대한 입소문 등은 영화광들의 종족 특성이다.
여기서 1990년대 잠시 왔던 영화광들의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때 양질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관람하며 눈이 높아진 영화광들은 스스로 한국 영화 발전의 자산이 됐다. 어떤 특정 인물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1990년대 영화광들이 현재 한국 영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는 많다.
또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괴작이며 문제작인 ‘크래쉬’의 재개봉을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영화들의 재개봉 소식도 들려온다. 이것을 ‘새로운 걸작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 대한 작용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들을 새로운 세대의 영화광들에게 보여주며 영화라는 예술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시도로 바라볼 수도 있다. 결국 영화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속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