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조선 8대 명당에서도 으뜸가는 김극뉴(金克忸)의 묘가 있다. 김극뉴는 조선 성종대의 문신으로 사간원(임금에게 간하는 일을 하는 관아)의 대사간(사간원의 수장)을 역임했으며,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의 장남이다. 일설에 의하면 아버지 김국광이 좌의정 시절 혼자 8개월간 의정부를 맡은 것이 부끄러워 “너라도 자라서 이런 부끄러움을 이겨내라”는 뜻에서 극뉴(克忸)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대개 명당임을 언급할 때는 묘를 쓴 이후 얼마나 후손들의 번창이 있었는지로 가늠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극뉴의 묘는 명당임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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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뉴의 묘. |
김극뉴는 광산 김씨로 묘를 쓰고 나서 그 문중에서 문과 급제자가 265명이 나왔으며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숙종비 인경왕후), 공신 9명, 청백리 5명을 배출했다. 특히 김극뉴는 예학을 집대성하여 문묘에 함께 배향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5대조이다. 김극뉴의 묘와 그를 기리는 영사재의 주산(主山·뒷산)인 용마산은 말머리를 닮았으며, 마흘(馬屹)이라는 마을 이름도 용마산이 우뚝 솟은 말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묘 입구에 있는 재실인 영사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다.
영사재의 모든 곳은 무득무해(無得無害·득도 해도 없음)한 기운이 흐르지만 대청마루에는 생기가 강하게 분출하고 있다. 대청마루가 파워스팟이다. 세간에는 김극뉴의 묘를 말명당이라 한다. 말은 콧구멍에 생기가 응결되어 있으며 김극뉴의 묘가 말의 콧구멍에 해당하므로 명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히 사물의 형상만을 보고 혈(穴)을 표현하는 방식인 물형론(物形論)은 정확한 혈자리를 찾는 데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먼저 현장을 답사하여 혈처(穴處·명당자리)를 파악한 연후에 산천 형세를 사람 짐승 새 등의 물형(物形)에 빗댄 이름을 지어야 한다.
외손발복지지(外孫發福之地)로 유명한 김극뉴 묘역은 제일 위에 김극뉴의 장인인 함양 박 씨 박예 부부 합장묘가 있고, 중앙에 김극뉴의 부인인 함양 박씨, 그 아래에 김극뉴의 묘로 되어 있다. 김극뉴 묏자리는 아들이 없던 장인이 자신은 위로 올라가고, 자신이 점지한 그 자리를 사위에게 주었다는 설과 김극뉴의 처가 아버지가 잡은 자리가 최고의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밤에 몰래 물을 가득 부어 흉지가 되게끔 보이도록 해 남편을 묻었다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를 빗대어 ‘딸자식은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용마산의 넓고 튼실한 용맥(龍脈·산줄기)이 좌우요동을 하면서 내려오다가 그 폭을 점점 좁혀 김극뉴의 묘에 최종 안착을 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무리를 이루어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내청룡과 내백호 역할을 하며, 그 바깥쪽에 외청룡, 외백호가 수구(水口·기가 드나드는 출입구)를 좁혀 생기의 빠짐을 억제하고 있다. 안산(案山·앞산)은 수형산(水刑山)을 이룬 봉우리의 가장 우측의 산으로 묘를 치는 세찬 바람을 순화시키면서 생기의 누출을 막고 있다. 김극뉴의 장인과 부인인 함양 박 씨의 묘 또한 중상급에 속하는 길지(吉地)임은 분명하나 생기가 옹골차게 응집한 곳은 김극뉴의 묘임이 틀림없다. 이곳 묘역은 여기(餘氣·남아있는 기운)가 있는 지점에 김극뉴의 아들과 증손, 사위와 딸의 합장묘 등을 조성했으며, 모두 중상급에 해당하는 생기를 품은 묘란 점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즉 생기가 결집된 김극뉴 묘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생기라도 얻기 위해 그 주변의 터에 자손들의 묘를 썼는데, 오늘날의 가족묘나 문중묘를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