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 권의 책에는 누군가의 10년이 담겼다고 한다. 그러한 데는 저자가 책을 집필하는 데 통상적으로 쓰이는 1년이란 시간뿐만 아니라, 그 책을 쓰기 위해 저자가 참고한 수많은 자료와 경험이 겹겹이 쌓인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좋은 책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삼독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저자의 지난한 사유를 따라가기 위해서 삼고초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20대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우연히 일독했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어느 겨울날에 아이들의 수업을 준비할 때 이독했으며, 지난주 봄의 초입에 학부모 독서모임을 준비하며 삼독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말괄량이 삐삐’로 유명한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1983년에 출간한 장편동화이다. 제목과 표지만 봐서는 어느 형제의 신나고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가 펼쳐질 듯하지만, 이 작품은 동화라는 장르적 특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깊이를 지닌다. 씩씩하고 너그러운 요나탄이 불이 난 집에서 동생인 카알을 구하려다 죽게 되고, 형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병약하던 카알도 죽음을 마주한다. 그리고 둘은 린드그렌이 만든 사후 세계인 ‘낭기열라’에서 재회한다. 낭기열라는 생전에 요나탄이 카알에게 늘 이야기한 모두가 행복한 이상 세계이다. 그러나 그곳의 ‘현실’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형제가 사는 벚나무 골짜기는 흥겹고 평화로웠으나, 이웃한 들장미 골짜기는 독재자 탱일의 지배 아래 지독한 굶주림과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결국 두 형제는 낭기열라의 평화를 위해 긴 여정을 떠난다.

이 작품은 용기라는 내재적 가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카알은 요나탄에 비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약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카알은 들장미 골짜기로 먼저 떠난 요나탄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고도 시시각각 거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부딪힌다. 그러나 형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용기를 내어 장애물을 하나씩 헤쳐나가며 성장한다. 요나탄 역시 용맹한 성격을 가졌지만, 그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낭기열라의 평화를 위해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러한 둘의 용기는 거친 물살을 타고 자유와 존엄성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가치로 이어진다. 요나탄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며, 거센 강물에 휩쓸리는 적군을 구해주거나 적과 전투 중에도 상대를 죽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이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지키려는 그의 신념이 철저히 반영된 행동이다. 여기에서 린드그렌은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배제된 자유와 행복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980년, 열다섯 살 소년 동호와 광주시민은 자유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계엄군이 몰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들은 끝내 총을 무기화하지 않았다. 총칼 앞에서도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 그들의 행동은 마지막까지 지켜낸 존엄성의 표상이었다. 생사의 경계 앞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은 광주시민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유를 향한 불꽃이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이는 카알이 보여준 선택과도 닮았다. 카알은 요나탄의 태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다가 점차 형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카알이 작품 속 배신자의 결말 앞에서 다른 어떤 감정보다 슬픔을 먼저 떠올린 이유이기도 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새 학년, 새 계절을 맞이한 거리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반면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국내외 정세는 진흙탕처럼 혼탁하고, 경제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할까.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 던지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질 때만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견뎌낸 한 작가가 쓴 오래된 동화 속에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