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네이처 지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과학자의 75%가 미국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연구비 삭감과 연방 과학 프로그램의 중단 등으로 연구 환경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효율성’과 ‘미국 우선주의’로 요약되는 정책 기조는 과학계 전반에 불확실성을 가중시켰고, 이는 연구자들의 경력뿐만 아니라 미국 과학의 지속 가능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사이언스 지는 4월 1일자 기사에서 “만우절 농담이 아닌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연구 환경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과학이야말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지속성이 흔들릴 때 사회는 판단의 기준을 잃고 흔들릴 수 있다.
기술 패권의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과학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인공지능 바이오 반도체 에너지는 모두 과학의 발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과학을 ‘정답을 주는 학문’이라고 오해한다. 실험 결과 수치, 통계 모델이 언제나 즉시적이고 명확한 해답을 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것은 과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시각이다.
과학은 언제나 불확실성과 함께 출발한다. 관찰과 해석, 이론이라는 틀, 그리고 인간 지식의 한계 속에서 과학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아인슈타인은 “무언가를 관찰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이론에 달려 있다. 무엇을 볼 수 있을지는 이론이 결정한다”고 말했다. 즉, 과학은 명확한 결론을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줄여가며 더 나은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탐구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언제나 겸손함과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과학의 본질을 보여준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마리 퀴리다. 그녀는 1898년, 방사능을 띄는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고, 그 업적으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어 1911년에는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당시 초록빛을 내뿜는 라듐은 신비한 물질로 여겨졌다. 퀴리 역시 라듐을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애정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라듐이 병든 세포를 건강한 세포보다 빠르게 파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방사선을 암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퀴리는 이 모든 발견에 대해 상업적 특허를 등록하지 않았다. “과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것”이라는 그녀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녀는 라듐과 폴로늄이 인류 공동의 자산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지식과 기술을 모두를 위해 공개했다. 이후 라듐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야광시계 화장품 식품 의약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라듐은 강력한 방사성 물질이었다. 당시에는 그 위험성이 밝혀지지 않아, ‘라듐 걸스’ 사건처럼 산업 현장에서 치명적인 피폭 피해가 발생했다. 마리 퀴리 자신도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했다. 이 사례는 과학이 즉각 완벽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이지만, 동시에 과학이란 본래 불확실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임을 잘 보여준다.
퀴리의 연구는 이후 수많은 후속 연구자들에 의해 이어졌고, 그가 사망한 30여년 후인 1960년대부터 라듐 사용은 규제되기 시작했으며, 방사선 치료에는 보다 안전한 물질이 사용되도록 개선됐다. 이처럼 과학은 완전하지 않지만, 과거의 오류를 숨기지 않고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퀴리의 시대든 지금 이 시대든, 이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인공지능(AI) 시대, 팬데믹 이후의 세계, 기후 위기와 기술 격변 등으로 표현되는 작금의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과학은 어느 때보다도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방향을 설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지원과 관심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