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용어가 세상의 용어로 바뀌는 경우가 발견된다. 라틴어 propago는 ‘번식하다’ ‘보급하다’ ‘확장하다’ ‘영속하다’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이 단어가 ‘~ 해야만 한다’라는 동형사(gerundivo) 형태를 띄면, propaganda라는 단어가 된다. 이 단어는 ‘선전’ ‘확산’이라는 뜻을 지닌다. 16세기 이후 ‘신앙의 확산’(propaganda fidei)이라는 교회의 선교를 지시한 이 용어가 오늘날에는 정치와 이념의 ‘선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용어인 심판(judgment)은 다시 반복되거나 그 결정을 거스르거나 무효화할 수 없는 고유한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선거 때가 되면 ‘유권자의 투표로 심판하여 주십시오’라는 선전 문구도 그러하다. 선거(election)와 투표(vote)는 유권자의 선택(choice)일 뿐이지, 심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거와 투표는 반복되고 또 유권자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절차에 의해 선거의 결과를 무효화할 수 있다. 따라서 선거에서 심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유권자의 심판이 아닌 선택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회나 정치의 영역에서 왜 이렇게 과도하고도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할까? 대화와 타협이 없는 정치는 대화의 두 당사자 중 하나를 제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가 반복되면, 결국 선거의 승패에 따라 유권자 자신도 승리하거나 심판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극단을 바탕으로 유권자 서로가, 또 사회 공동체 전체가 심판하려 하고 또 선거 결과에 따른 형벌을 부과한다. 선거에서 후보자는 선택받지 못하도록 악마화되어야 하며 또 그 후보자를 지지하는 유권자도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와 같은 신념을 지닐 수밖에 없는 유권자는 신념의 극대화를 조장하는 정치의 프로파간다에 물들어간다. 사실, 선거철에 유권자는 후보자를 심판하는 신의 영역으로 드높여지지만, 선거가 끝나면 심판을 이겨낸 권력이 위임된 선택된 이들만이 신의 영역으로 드높여진다. 따라서 선거에서 선택된 이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쩌면 인간은 문명과 야만의 회로에서 순환하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정적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이러한 정치적 심판에서 파생되는 형벌과 처벌로써 개인이나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위협하는 적이 된다. 홉스는 이를 두고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고 집약한다. 근대의 철 지난 정치 공학이 한참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되돌아왔다.
유쾌하지 않으며 또 자극적인 정치적 현수막은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정보 홍수 시대에 정치적 현수막에서 드러내는 한 두 줄 구호나 문장은 시각적 소음과 같다. 이러한 선전은 자신과 공동체 이익을 위해 바뀔 수 있는 선택을 신념화하고 또 법의 판단 없이도 정치적 상대방과 그 유권자들을 인정적으로 낙인찍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생물(生物)인 정치를 신념으로 화석화한다. 우리 시대 체제가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지탱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선택이 고정됨이 아니라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이고, 결국 주권자는 선거에서 선택을 받아 위임된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 아니라 유권자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선거가 후보자들에게는 데스 매치(death match)로 인식될 만큼 절박한 것이지만, 유권자들에는 여러 선택이 가능한 축제일 뿐이다. 유권자는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과 낙선을 반복해서 경험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유권자들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것은 정치 기술자들일 뿐이다.
선거가 심판인가? 투표의 결과로 낙선된 후보자는 다시는 정치적으로 재기하지 못하는가? 혹은 투표 결과로 낙선된 후보자를 지지하는 유권자는 낙선된 후보자와 함께 정치적으로 심판 받아야 하는가? 선거는 유권자의 선택일 뿐이다. 선거와 심판을 연결하려는 이러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우리 사회에서 지양되어야 한다.